메뉴 건너뛰기

조회 수 114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 이 글은 필자가 전에 각종 잡지에 기고했거나 설교한 글을 옮긴 것입니다.

 

성경 말씀대로 살아보기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 21:28-31)

A. J. 제이콥스라는 괴짜 미국인 작가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미국의 대중잡지인 에스콰이어 편집인이기도 한데, 총 32권, 3만3천 쪽에 달하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2002년에 <한 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커>라는 책을 낸 사람입니다.
그 다음에 제이콥스는 성경의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따르기로 결심하고 지난 2005년 9월 1일부터 387일간 실천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성경 말씀대로 살아 본 1년>이라는 책을 냈는데, 이 책들은 둘 다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고 파라마운트 영화사에서 영화로 만들려고 한다고 합니다.
성경 말씀대로 살기 위해 실천할 항목을 추려보니 700개가 되었습니다. 시행 첫 날, 줄을 서 있는데 새치기하는 사람을 보았지만 “노하기를 더디하라”는 말씀에 따라 참았고, 길거리 빌딩에 걸린 야한 광고를 보지 않으려 머리를 숙인 채 걸었으며, 두 가지 실로 짠 옷을 입지 않으려고 회사에서 지급한 혼방 티셔츠를 옷장에서 모두 치웠습니다. 또 매달 첫 날에는 나팔을 불고, 열 줄 비파를 구입해 켰는가 하면, ‘머리를 둥글게 깎지 말고 수염 끝을 손상하지 말라’는 말씀을 따라 면도도 하지 않았으며, 생리중인 아내와 접촉을 피하려다 다투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불경'한 자에게 돌을 던지려고 다가갔다가 결국 신발 위에 돌멩이를 내려놓는 척하기도 했습니다. “탐하지 말라”는 계명을 실천하기 위해 탐욕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광고가 게재된 잡지와 신문의 구독을 줄이기도 했습니다. 참 재미있는 사람입니다.
AJ제이콥스.jpg
 

1. 맏 아들
오늘 본문의 비유 중에 아버지는 하나님을 의미하고, 포도원은 교회를 의미합니다. 아버지가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하자 맏아들은 가겠다고 하고 가지 않았고, 둘째 아들은 싫다고 했으나 나중에 뉘우치고 갔습니다.
맏아들은 당대 유대 지도계층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한다고 공언하였으나 그것은 외식에 불과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23장 28절에서 그들이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다고 책망하셨습니다. 또 요한복음 9장 41절에서는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차라리 하나님의 뜻을 몰랐다면 죄가 없었을 것이지만, 알면서 행치 않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우리나라 인구가 2012년 6월 23일에 5천만 명을 넘었는데, 기독교 인구는 약 8백6십만 명 정도 됩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사람 5.8명 당 1명이 기독교인인임을 의미합니다. 천주교인 4백70만 명을 합치면 3.8명 당 한 명이 기독교인입니다.
우리나라 사람 약 네 명 중 한 사람이 기독교인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어떻습니까? 우리 기독교인들 때문에 더 정직해지고, 더 화목해지고, 더 행복해졌습니까?
지난 2007년 7월 8일, 한국 개신교회는 평양부흥 백주년을 기념하여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한국교회 대부흥 100주년 기념대회’를 가졌습니다. 사랑의 교회 원로 목사인 옥한흠 목사님께서 대표 설교를 했는데 제목은 ‘주여, 살려 주시옵소서’였습니다.
옥 목사님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계 3:1)였던 사데교회의 형편이 바로 한국교회가 처한 상황이라고 처방하였습니다. 한국교회는 겉으로 볼 때는 살아 있는 교회같습니다. 세계에서 이렇게 열렬히 새벽기도를 드리는 교회가 없습니다. 길이나 역전에서는 노방전도하는 사람들을 흔히 만날 수 있고, 세계 10대 교회 중 5개가 우리나라에 있습니다.
그런데 국제투명성기구(TI)에서 발표한 2012년도 우리나라 부패지수(CPI:Corruption Perceptions Index)는 조사대상 국가 176개국 중 45위입니다. 2010년 39위에서 2011년 43위에서 더 떨어진 것입니다. 참고로 일본은 17위입니다.
또 교회에 대한 사회적 신뢰도도 땅에 떨어져 있습니다. 지난 2005년부터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글로벌리서치에 의뢰해 전국 성인남녀 천 명을 대상으로 실시해 2008년부터 2010년까지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를 실시하였는데, 기독교에 대한 신뢰도는 2008년 18.4에서 2010년에는 17.6으로 떨어졌습니다. 신뢰하지 않는다는 2008년 48.3에서 2010년 48.4로 더 증가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국민의 82.4%가 교회를 불신하거나 썩 믿을만하게 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옥한흠 목사님도 교회에 대한 사회적 신뢰도가 떨어진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언행의 불일치, 즉 행함이 없는 믿음 때문이라고 지적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청중은 원래 귀에 듣기 좋은 말씀을 선호하는 경향이 높습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고 하면 모두가 아멘 합니다. 믿음만 있으면 하늘의 복도 받을 수 있고, 땅의 복도 다 받을 수 있다고 하면 할렐루야 하면서 열광합니다.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을 거짓 믿음이요, 구원도 확실할 수 없다고 말하면 얼굴이 금방 굳어져 버립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죄를 지적하거나 책망하면 예배 분위기가 금방 싸늘해져 버립니다.”
옥 목사님은 그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청중들이 좋아하는 말씀을 일부러 골라서 설교하게 되었고, 그 결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복음을 조금씩 변질시키는 설교자가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결과 교회가 커질수록 말씀대로 순종하는 행위에는 별 관심이 없고 믿음만 갖고 떠드는 값싼 은혜에 안주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꾸 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옥 목사님은 마치는 기도에서 “제가 죄인입니다. 제가 한국교회, 입만 살았다고 떠들고 행위가 죽어버린 한국교회를 만든 장본인입니다.”라고 고백하고, “겉은 요란하지만 내면은 죄악이 쌓여있는 … 한국교회를 깨끗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의 설교는 파격이었고, 죄의 고백이었고, 자신에 대한 벌거벗음이었습니다. 상암경기장을 메운 10만 성도들의 입에서는 절규가 터져 나왔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언행불일치 신앙의 원인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무시 혹은 적대감에 있습니다. 마틴 루터에 의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재강조 되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행위는 구원에 아무런 공로가 되지 못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비텐베르크에서 34년간 4천 번 이상 설교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루터의 신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의 메시지를 곡해하기 시작했고, 순종에 무관심하게 되었고, 그 도시는 믿음의 방종이 난무하는 타락한 사회가 되어갔습니다.
우리는 믿음과 율법에 관한 성경의 조화 있는 가르침에 주목해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3장 28절에서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고 말하고, 이어서 31절에서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원문에는 ‘하나님께서 금하시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 사람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운다는 것이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입니다. 성경 그대로 믿을 때, 믿음의 올바른 결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또 야고보서 2장 22절에도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올바른 믿음은 행함으로 나타나고, 이런 행함이 있을 때 믿음이 온전해진다는 것입니다. 마치 자전거 뒷바퀴가 앞바퀴를 따르듯, 행함은 올바른 믿음의 결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엘렌 G. 화잇은 가려뽑은 기별 1권 377쪽에서 믿음과 행함과 구원과의 관계를 아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선한 행실로 말미암아 단 한 사람의 영혼도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와 반면에 어떤 영혼도 선한 행실이 전혀 없이 구원 받기란 불가능하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거짓이며, 진리가 아닙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2장 4절에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요일 2:4)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둘째 아들
둘째 아들은 공공연하게 복음을 거절하고 죄를 짓는 생애를 사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물론 이런 사람들이 끝까지 그런 태도를 버리지 않는다면 맏아들과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 중 많은 사람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였습니다. 침례 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3:2)고 외쳤을 때 그들은 즉시 회개하고 자신들의 죄를 자복하였습니다.
둘째 아들이 칭찬을 받은 것을 말을 잘했기 때문이 아니라, 잘못을 뉘우치고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어느 교파 할 것 없이 전반적으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종교가 없는 사람들에게 가장 신뢰하는 기관이 무엇인지 물었더니 시민단체(59.5) > 언론기관(11.9) > 정부(9.8) > 사법부(7.0) > 없음 (6.9) > 개신교회(3.2) > 국회(1.4) 순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래도 교회가 국회보다 한 발 앞선 것이 다행인지, 한심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개신교, 가톨릭, 불교 중 가장 신뢰하는 종교기관이 무엇인지 물었더니 ‘가톨릭교회(41.4%)’ > ‘불교(33.5%)’ > ‘기독교(20.0%)’ 순으로 나타났습니다. 가톨릭교회는 3년째 상승세를 보이는 반면, 개신교회는 전년도 2위에서 3위로 내려 앉았습니다. 1990년 경부터 교회 위기라는 말이 떠돌기 시작했는데 현재는 그러한 현상이 체감할 정도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청소년들이 교회를 등지고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께 교회를 살려달라고 기도할 때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교회를 살릴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교회가 부흥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실천하는 신앙, 언행일치하는 신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교인이 교인다워지는 것입니다.
엘렌 G. 화잇은 “사람의 진실성의 증거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행실에 있다.”(실물, 272)고 하였습니다. 이제는 말할 때가 아니고 행할 때입니다.

3. 말씀을 받아들이는 태도
오늘 본문의 주제는 말씀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관한 것입니다. 맏아들은 말은 가겠다고 했지만 가지 않았고, 둘째 아들은 싫다고 했지만 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말을 주목하시는 것이 아니라 행함을 주목하십니다. 말을 어떻게 했든 결국이 어떻게 되었느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불교에서는 “근기”(根機, 根器)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데요, 부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능력을 의미합니다.
“최상근기”는 도를 듣는 순간 깨닫고 일체의 결박을 끊어버리는 사람입니다. 말에 비유하자면 채찍을 드는 그림자만 보아도 마부의 뜻을 아는 말입니다.
“상근기”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공부에 정진하는 사람입니다. 옳다 그르다 등 마음의 벽이 높지 않고 그런 것에 초연한 사람입니다. 말에 비유하자면 채찍이 털에 닿기만 해도 마부의 뜻을 아는 말입니다.
“중근기”는 때로는 도에 심취하기도 하고, 때로는 다 잊고 현실생활에 골몰하는, 완전히 몰입되어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옳다 그르다 등 마음의 벽이 높아서 평생 놓지 못하고 집착합니다. 말로 말하면 채찍이 몸에 닿아야 마부의 뜻을 아는 말입니다.
“하근기”는 그저 복이나 받고 나쁜 일이나 안 생겼으면 하는 기복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법문을 들으나 마나 한 사람입니다. 마음의 벽이 높아 아무 것도 아닌 것에 자주 목숨 걸고, 사소한 것에 마음이 흔들리는 사람입니다. 말로 말하면 채찍으로 호되게 얻어맞아야 마부의 뜻을 따르는 말입니다.
노자도 비슷한 말을 했는데요, 노자 41장에 보면 상사문도(上士聞道) 근이행지(勤而行之), 중사문도(中士聞道) 약존약망(若存若亡), 하사문도(下士聞道) 대소지(大笑之)라 했습니다.
즉 상사는 도를 들으면 부지런히 행하고, 중사는 도를 들으면 하는 듯 마는 듯하고, 하사는 크게 웃는다 즉 비웃는다는 뜻입니다.
나는 어디에 속할까요?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13장에서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가에 떨어지고, 어떤 것은 돌밭, 어떤 것은 가시떨기,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집니다. 길가에 떨어진 것은 새가 먹어버렸고, 돌밭에 떨어진 것은 뿌리가 없어 해가 뜨자 말라버렸고, 가시떨기에 떨어진 것은 가시떨기에 치여 자라지 못했고,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백배, 육십배, 삼십배 결실을 합니다.
“길가”는 말씀을 듣고도 전혀 깨닫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마음에는 이미 세상 것들이 가득 차 있어서 말씀이 들어갈 공간이 없습니다. 하근기입니다.
“돌밭”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아가 너무 강하고, 그리스도께 온전히 굴복하지 못하였습니다. 신앙이 무언가 도움이 되는 것처럼 보일 때는 즐겨 따르지만 극기와 희생이 요구될 때는 넘어지고 맙니다. 중근기입니다.
“가시떨기”는 말씀에 순종하여 자타가 인정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한 사람입니다. 헌신도 하고 교회에서 직분을 맡아 많은 일들을 이루기도 합니다. 그런데 마음 안에 진정한 도덕적 변화를 경험하지는 못합니다. 전에 세상에서 가졌던 습관과 행위와 죄된 생애, 그리고 가치관을 온전히 버리지 않습니다. 신앙도 자라지만 이러한 특징들도 함께 자라납니다. 어느 날, 엄청난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이 닥칩니다. 마침내 곡식은 가시에 덮여 죽고 맙니다. 상근기입니다.
“좋은 밭”은 말씀을 듣고 온전한 거듭남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의 마음 밭은 갈아엎어지고, 잡초와 가시들이 모두 제거됩니다. 그는 그리스도와 온전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그리스도를 닮게 되고 하나님께, 교회에 유용한 사람이 됩니다. 최상근기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셔서 우리 모두가 좋은 밭이 되기 바랍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제이콥스 이야기를 조금 더 하고 마치겠습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3만3천 쪽이나 됩니다. 300쪽 짜리 책으로 110권이 되는데, 실제 글자 크기 등으로 보면 훨씬 더 많을 겁니다. 저자가 9,500명이나 되고, 항목이 6만5천개, 그림이 2만4천개, 영어로 단어수가 4,400만개나 됩니다. 제이콥스는 1년 동안 평일에는 4시간씩 이것을 읽고, 쉬는 날에는 하루 종일 읽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실천할 수 있는 항목을 700가지 뽑아 1년 동안 실천해 보았습니다.
백과사전을 읽는 것과 성경 말씀을 실천하는 것 중 어느 쪽이 힘들겠습니까? 제이콥스는 “실천하는 것이 더 힘들었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그는 성경의 문화적, 시대적 배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문자 그대로 실천해보려 했기 때문에 안 해도 되는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하여튼 말씀대로 사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는 그 책을 쓰기 전이나 후나 ‘신(神)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입니다. 그러나 1년 동안 말씀대로 살아본 결과 엄청나게 힘들기는 했지만 테레사 수녀만큼은 아니라도 분명히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또 행동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전에는 생각이 바뀌어야 행동이 바뀐다고 생각했는데, 행동을 바꾸면 생각도 바뀐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감사 기도가 자기 인생을 가장 크게 바꾸었다고 말했습니다. 항상 기도하라는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매일 적어도 세 번씩 기도를 했는데, 태어나서 한 번도 기도를 해본 적이 없어서 처음에는 좀 어색했다고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대로 감사 기도를 자주 드렸더니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루에 서너 가지 잘못된 일보다는, 비록 사소한 일이라도 매일 벌어진 수백 가지 잘되는 일에 감사하기 시작하자 진지한 삶의 태도를 갖게 됐고,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또 “성경 말씀을 실천하고 나서 성스러움에 대한 경외감을 갖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은 ‘경건한 불가지론자’(reverent agnostic)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마음의 밭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시험적으로 성경을 시험해 본 결과 많은 유익을 얻었습니다. 성경 통독도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참된 변화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며,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될 것입니다. “성경 말씀대로 살아보니” 여러분도 한번 도전해 보시기 바랍니다.

박성하 목사 / 로뎀아카데미 원장

 

Atachment
첨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