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希望)
런던의 랍비인 휴고 그린(Hugo Gabriel Gryn, 1930–1996)은 독일 집단 수용소에서 겪은 한 체험담을 전후(戰後) 독일의 데르 모르겐(Der Morgen) 잡지에 이렇게 기고했다.
“1944년의 몹시 추운 겨울이었다. 아버지는 나와 몇 친구를 수용소 건물 한 구석에 모이게 하셨다. 아버지는 그날이 유대인의 명절인 ‘하누카의 저녁’이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진흙 주발에 수용소에서 좀처럼 구하기 힘든 귀한 버터를 녹여 심지를 적시고 촛불을 대신하여 불을 켜셨다. 나는 그 귀한 버터를 먹지 않고 낭비한다고 항의했다. 아버지는 나를 가만히 보시더니 말씀하셨다. ‘사람은 밥을 먹지 않고도 3주간은 살 수 있다. 우리는 한때 물을 마시지 않고 3일을 살아 있었다. 그러나 희망이 없이는 한순간도 살 수가 없단다.’”
하루아침에 유명해진 그림
2008년 말, 영국 런던 테이트 갤러리(Tate Gallery)에 소장되어 있는 “희망”(Hope, 1886)이라는 그림이 갑자기 전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된다. 이 그림은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화가 조지 프레드릭 와츠(George Frederic Watts, 1817~1904)가 그린 것이다. 버락 오바마는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이 그림이 자신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고 말한바 있다. 결국 그는 2008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인 존 매케인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어 2009년 1월 제 44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탄생한 것이다.
“희망”이란 그림은, 한 여성이 커다란 구(球) 위에 앉아 애처로운 자세로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녀의 눈은 붕대로 가려져 있다. 악기는 리라(lyre) 즉 수금이다. 그런데 수금의 줄은 다 끊어지고 단 한 줄만 간신히 남아 있다. 이 그림의 커다란 구는 우리가 사는 지구를 의미한다. 눈을 가린 여자는 인류를, 수금의 끊어진 줄들은 인간의 절망을, 그리고 마지막 남은 한 줄은 희망을 상징한다. 이 그림은 우리 인간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한 가닥 남은 희망에 의지해 살아가는 존재임을 나타낸다.
오바마는 이 그림을 보며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되려는 희망을 놓지 않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남아프리카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된 인권운동가 넬슨 만델라가 26년 동안 옥살이를 하면서 침침한 감방 벽에 걸어 놓고 수도 없이 바라보았다는 그림도 바로 이 그림이다.
말틴 루터는 “이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희망이다.”라고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희망은 잠자고 있지 않는 인간의 꿈이다. 인간의 꿈이 있는 한, 이 세상은 도전해 볼만하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꿈을 잃지 말자. 꿈을 꾸자. 꿈은 희망을 버리지 않는 사람에겐 선물로 주어진다.”고 하였다.
희망고문
“희망고문”이라는 말은 가수 박진영이 ‘러브에세이’에 언급하면서 유명해졌다. 이 말의 원조는 19세기 프랑스 작가인 오귀스트 빌리에 드 릴아당(Auguste Villiers de l’Isle-Adam, 1838~1889)이 쓴 단편 소설 “희망이라는 이름의 고문(The Torture by Hope)”이다. 유대 랍비가 고리대금업을 했다는 죄로 감옥에 갇힌다. 어느 날 탈출구를 발견하고 탈옥에 성공하는 순간, 종교재판소 소장이 다시 그를 붙잡는다. 그 순간을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이 운명의 저녁은 미리 준비된 고문이었다. 바로 희망이라는 이름의 고문.” 릴아당은 희망을 갖게 했다가 다시 빼앗아 버리는 것이야말로 가장 잔인한 고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애초에 희망이 없었더라면 일찍 포기하고 손을 뗄 수 있었을 텐데, 일말이라도 가능성이 보이면 그것을 붙들고 무엇인가 해보려 노력하다가 끝내 수포로 돌아갔을 때의 인간의 심리를 반영한 단어가 바로 “희망고문”이라고 할 수 있다.
“타짜”라는 영화에서 정 마담이 이렇게 독백한다. “화투판에서 사람 바보로 만드는 게 뭔지 아세요? 바로 희망. 그 안에 인생이 있죠. 일장춘몽.” 다음 판에서 터질 것 같은 희망, 그러나 결국 빈손으로 일어나게 만드는 것이 노름이고, 그것이 희망고문인 것이다.
1516년, 영국의 사상가 토머스 모어는 상상의 섬 ‘유토피아’를 제시했다. ‘이상향’으로 번역되는 이곳은 공산주의 경제 체제와 민주주의 정치 체제 및 교육과 종교의 자유가 완벽하게 갖추어진 가상(假想)의 이상국이다. 이 사상은 토마스 캄파넬라의 “도시와 태양”, 요하네스 안드레아의 “크리스티아 노폴리스 공화국 묘사”, 프랜시스 베이컨의 “뉴 아틀란티스”, 볼테르의 “캉디드” 등 수많은 문학작품에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유토피아란 말 자체가 그리스어의 ou(없다)와 topos(장소)를 조합한 말로서 “어디에도 없는 장소”를 의미한다. 이 땅에 그런 이상향은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병신년(丙申年) 새해를 맞았다. 새해마다 우리는 “희망찬 새해”라는 말을 쓴다. 왜냐하면 우리는 희망이 없는 내일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희망고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인류의 진정한 희망은 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있다. 새해를 맞으면서, 우리 시선은 2016년 한 해를 넘어 영원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성경은 평생 그곳을 소망하며 산 사람들의 삶을 이렇게 묘사한다.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약속하신 것을 받지는 못했으나, 앞으로 올 것들을 멀리서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이 땅에서 나그네일 뿐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들은 더 나은 고향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하늘에 있는 고향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해 한 성을 예비해 주셨습니다.”(히브리서 11장 13, 16절)
박성하 / 로뎀아카데미 원장
2016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