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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수 강으로의 초청

 

어린 양의 아내-새 예루살렘

선악의 긴 쟁투가 끝나자 천사는 요한과 우리를 어린 양의 아내에게 인도한다.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요한계시록 219)

이 천사는 요한계시록 17장에서도 우리에게 한 여자를 보여 줬다. 땅의 임금들과 음행하던 그 여자는 도시 곧 큰 성 바벨론이었다.

어린 양의 아내인 요한계시록 21장의 여자 역시 도시 곧 새 예루살렘이다.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요한계시록 2110, 11)

요한계시록에서는 혼인잔치라는 용어가 선악 간 대쟁투 차원에서 사용되었다. 본래 아담은 지구성의 지배자였다(창세기 126). 아담이 사탄의 유혹에 굴복하여 그의 종이 됨으로(베드로후서 219) 지구의 통치권은 사탄에게 넘어갔다. 따라서 사단은 이 세상 신”(고린도후서 44)으로 불리운다. 첫째 아담이 잃어버린 지구의 통치권을 둘째 아담(고린도전서 1545)이신 예수께서 되찾으실 것이었다. “너 양떼의 망대요 딸 시온의 산이여 이전 권능이 네게로 돌아오리라”(미가 48)는 말씀이 성취된다. 요한계시록은 이것을 어린 양의 혼인잔치로 묘사한다(요한계시록 196-8).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서 신랑은 예수이며, 신부는 그리스도 왕국의 수도요 상징인 새 예루살렘이다. 우리 모두는 그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손님이다(요한계시록 199). 예수께서 그의 신부 곧 새 예루살렘과 혼인하는 것은, 아담이 잃어버린 지구의 통치권을 회복하시는 것에 대한 상징이다.

 

새 예루살렘의 모습

요한은 천사를 따라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새 예루살렘 성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었다(요한계시록 2110). 천사가 금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16)았다. 1 스다디온(stadion)이 약 185미터이므로 12천 스다디온은 약 2,218킬로미터가 된다. 이것이 성의 둘레인지, 한 면의 길이인지 요한이 정확히 말하지 않았지만, 둘레라면 성 한 면의 길이는 551.4킬로미터이다. 성의 높이도 길이나 넓이와 같다는 진술은 의문이 든다. 이것은 길이, 넓이, 높이의 비율적 조화를 의미할 수도 있고, 성곽 꼭대기의 둘레가 밑바닥 둘레와 같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성곽은 144 규빗이었는데, 1 규빗이 약 44.5센티미터이므로 약 64미터이다. 요한은 이 치수가 성벽의 높이인지 두께인지는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다.

그 성에는 성벽 한 면에 세 개씩, 진주로 만든 열두 문이 있다. 그리고 각 문에는 이스라엘 12 지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 성의 기초석은 예수님의 열 두 사도들의 이름이 기록된 열 두 보석으로 되어 있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약 교회와 신약 교회의 밀접한 관계를 나타낸다. 사도 바울은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에베소서 220)고 말한다.

 

성전이 없는 도성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요한계시록 2122)

성전은 천여 년 이상 옛 예루살렘의 영광이요, 자부심이었다. 그런데 요한이 본 새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없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곧 성전이시기 때문이다.

옛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던 성막과 성소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휘장이 쳐져 있었다. 이 휘장은 사람들로 하나님 앞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하면서 동시에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를 갈라놓고 있었다. 죄가 그 휘장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애굽기 3320).

그러나 요한은 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본다. 더 이상 하나님과 인간을 갈라놓는 휘장이 존재하지 않는다. 구속을 받아 그들의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 곧 하나님의 품성을 회복한 사람들은 이제 그의 얼굴을 직접 본다(요한계시록 224).

 

생명수의 강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요한계시록 221, 2)

이 장면은 창세기 2장과 에스겔 47장이 배경이다. 에스겔은 성전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일천 척을 척량할 때마다 물이 발목, 무릎, 허리에 오르고 마지막에는 건너지 못할 강이 되어 흐르는 보았다.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모든 생물들이 살고, 강 좌우 가에는 각종 실과나무가 자라서 과실을 끊임없이 맺었다(에스겔 4712).

이것은 다함이 없는 생명이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와 만물을 소생시킬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생명의 원천”(시편 369)이시다. 죄는 이렇게 풍성하게 흘러내리는 생명의 원천으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킨 것이다. 우리는 다시 생명의 원천에 연결된다. 우리는 생명과를 먹게 된다. 그 과실은 분명히 노화를 방지하는 효소와 비타민을 함유하고 있을 것이다. 다시는 피곤하거나 병들거나 늙거나 죽지 않을 것이다.

 

성령과 신부의 초청

요한계시록은, 아니 성경은 두 팔을 활짝 펴는 것으로 맺는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요한계시록 2217)

성령과 신부 곧 황금빛으로 빛나는 도성 전체가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우리를 부른다. 이천년 전에 발송된 초청장이다. 당신이 이 초청에 응하기만 하면, 당신은 그 성에 들어가 생명수로 갈한 목을 축이고, 생명과를 먹으며 영원히 살 수 있게 된다.

나는 예수님을 만나기를 고대하고 있다. 여러분도 그럴 것이다. 우리는 머지않아 그분을 뵙게 될 것이다. 그 기쁨을 12세기 수도사 클레르보의 베르나르(1091-1153)는 이렇게 노래했다.

구주를 생각만해도 / 내 맘이 기쁘니 / 그 얼굴 친히 뵐 때야 / 내 기쁨 어떠랴

요한은 다음 말로 그의 계시록을 마친다.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요한계시록 2220) []

 

박성하 / 로뎀아카데미 원장

시조, 2010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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