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내비게이션을 켜라

by 로뎀 posted Apr 23,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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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글은 필자가 전에 각종 잡지에 쓴 것이나 설교문을 옮긴 것입니다.

 

인생의 내비게이션을 켜라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저는 기계나 전자제품을 아주 좋아합니다. 새로운 제품이 나오면 사지는 않더라도 기능이라도 알아봅니다. 그러나 여러 해 동안 내비게이션을 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때문에 내비게이션의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수년 전, 군대 간 아들 첫 면회를 갈 때,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차를 여러 번 갈아타야 하는데다, 먹을 것도 가져 가야하고, 또 연로하신 부모님과 딸까지 다섯 식구가 모두 가게 되어 할 수 없이 자동차를 갖고 가게 되었습니다. 인터넷으로 가는 길을 확인해서 종이에 지도를 그려 갖고 갔지만 중간에 길을 잃어버려 예정 시간보다 1시간 정도 늦게 도착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돌아오자마자 내비게이션을 샀습니다. 사용해 보니 편리한 점이 많습니다. 첫째, 혼자 운전할 때 어떤 여자가 계속 말을 해주기 때문에 어떤 때는 좀 시끄럽기는 하지만 때로는 덜 심심해서 좋고, 둘째, 앞에 굽은 길이나 과속방지턱, 사고가 많은 지역이 있을 경우 미리 알려줘서 사고를 예방할 수 있어서 좋고, 셋째, 언제 방향을 바꿔야 할지, 방향 전환을 위해 몇 차선으로 가야할지 알려줘서 편리해서 좋고, 넷째 속도위반 감시 카메라 위치를 알려줘서 사고 예방도 되고 벌금 무는 일이 없어서 좋고, 다섯째, 가끔 엉뚱한데로 돌아가긴 하지만 모르는 길도 그저 따라가기만 하면 틀림없이 목적지에 딱 데려다 줘서 좋습니다.
제가 사용해 보지는 않았지만 실시간으로 교통 흐름 정보를 수신해서 막힌 길을 피해 경로 안내를 받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참 살기 편리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1. 성경은 인생의 내비게이션이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라고 말했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주의 말씀은 내 발에 GPS요, 내 길에 내비게이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옛날 가로등이 없을 때 등은 매우 유용한 도구였습니다. 오늘날 모르는 곳에 자동차를 운전해서 갈 때 내비게이션은 아주 유용한 도구입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우리 인생의 유용한 안내자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사주를 보거나, 점도 치는 것은 미래를 알고 싶기 때문입니다. 등이 필요한 것은 어둠 때문에 앞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앞일을 모르기 때문에 궁금하고, 불안하고, 때로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점이라도 쳐서 자기 운세를 알아보려 하기도 하고, 그런 걸 통해 위험에 대비하려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설날 아침이 되면 모든 가족들이 큰 집에 모입니다. 아침을 먹고 나면 큰 집의 큰 형님이 토정비결을 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줍니다. “1월 달에는 말을 조심해라. 4월에는 북쪽에서 귀인이 나타나서 일을 도와준다고 하니 북쪽을 잘 지켜봐라. 그러나 서쪽은 불길하니 가면 안된다.” 이런 식입니다. 믿지는 않지만 공연히 귀가 솔깃해지고, 4월이 되면 서쪽으로 가는 것이 꺼림직 해집니다.
그러나 전도서 3장 11절에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7장 14절에도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전 7:14)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주나 점이 신통하게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예를 들어 1000명이 저에게 주식이 오를 것인지 내릴 것인지 자문을 구한다고 합시다. 제가 500명에게는 오를 것이라고 하고, 500명에게는 내릴 것이라고 예측을 해줍니다. 주식이 오르든 내리든 무조건 500명에게는 제 예측이 맞게 되어 있습니다. 기가 막히게 맞았다고 생각한 500명은 또 저에게 자문을 구할 것입니다. 저는 250명에게는 오를 것이라고 하고, 나머지 250명에게는 내릴 것이라고 예측을 해줍니다. 그러면 다시 250명은 맞게 됩니다. 그렇게 몇 번 반복하면 계속해서 맞는 사람들이 있게 됩니다. 계속하면 적어도 10명 정도는 제 예측이 한 번도 빗나가지 않고 백발백중 맞게 됩니다. 그들은 제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믿게 될 것입니다. 사주나 점도 이와 유사한 것입니다.
미래는 우리의 인간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영역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장래 일을 측량할 수 없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가려놓으신 미래를 알아내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점이나 사주 뿐 아니라 과학도 마찬가지입니다. 확률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확률을 연구하는 이론으로 확률론이라는 것이 있는데, 통계학, 수학, 과학 및 철학을 활용해 어떤 일이 일어날 가능성을 예측하는 것입니다.
일기 예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 기상청이 가끔 오보로 큰 곤욕을 치루는데요, 기상학에 “나비 효과”(Butterfly effect)라는 말이 있습니다. 미국의 기상학자 에드워드 로렌츠가 1972년에 미국 과학부흥협회에서 “예측가능성-브라질에서 한 나비의 날갯짓이 텍사스에 돌풍을 일으킬 수 있는가”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한데서 유래되었습니다. 나비 효과란 “혼돈이론”에서 초기값의 미세한 차이에 의해 결과가 완전히 달라지는 현상을 뜻합니다. 따라서 기상 예측에는 시간이 지날수록 오차가 크게 나타나고, 따라서 장기적인 기상 예보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미리를 예측할 수는 있지만, 예언할 수는 없습니다. 인생이란 것이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래를 궁금해 하고, 염려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막연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등 혹은 내비게이션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성경입니다.
사도 바울도 디모데후서 3장 16, 17절에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고 하였습니다.

위대한 신학자와 목자요 사상가요 성자인 어거스틴은 서기 354년 북아프리카의 연안 지방인 다가스테(Tagaste, 알제리 '숙아라스')라는 작은 읍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그는 16살 때 카리타고(Casritago)에 유학하는 동안 아프리카 여자와 사랑에 빠져 아이까지 낳게 됩니다. 그 후로 그는 끊임없이 쾌락을 추구하며 방탕한 삶을 살게 됩니다. 또 마니교에 빠져 정신적 방황을 하기도 합니다.
386년 8월 늦은 여름, 폰티키아누스(Ponticiannus)라는 친구가 찾아와 그와 더불어 애굽의 수도사 성 안토니우스(Antony)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됩니다. 그때 정욕에 사로잡힌 자신의 비참한 모습이 눈앞에 스크린처럼 드러났습니다. 어거스틴은 정원 뜰로 나갔습니다. 그는 자신이 죄의 포로가 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나는 언제까지 내일, 내일 그래야 하는가? 왜 지금은 안 되는건가? 나는 왜 이 추한 더러운 죄를 청산하지 못할까?”
폭우 같은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이웃집 뜰에서 아이들이 떠들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후렴 가사가 반복해서 들려왔습니다.
“들고 읽으라! 들고 읽으라!”(Tolle lege, Tolle lege)
어거스틴은 저게 무슨 놀이지 하고 생각해 보았지만 처음 듣는 노래였습니다. 문득 그것이 성경을 읽으라는 소리로 들려왔습니다. 그는 눈물을 그치고 서재로 뛰어 들어가 성경을 펴고 눈길이 처음 머무는 곳을 읽었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로마서 13:13, 14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좌우에 날선 검처럼 어거스틴의 가슴에 박혀 들어갔습니다. 이 말씀은 마치 자기를 위한 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그는 깊은 회심을 경험했고, 마침내 오랜 방황이 끝나게 됩니다.

여러분도 성경을 들고 읽으십시오. 오늘부터 성경을 펴서 읽으십시오. 그러면 성경은 여러분의 삶을 변화시키고, 앞길에 등이 되고 내비게이션이 될 것입니다.

2. 성경의 구조
아시는 것처럼 성경은 한권의 책이 아닙니다. 그것은 66권으로 된 매우 분량이 많은 책입니다. 따라서 성경 전체의 내용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대략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알게 되면, 성경이 더 쉽게 이해되고, 연구하는데도 도움이 됩니다.

첫째, 성경의 초점이 무엇인가? 성경이 궁극적으로 말하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요한복음 5장 39절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성경은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성경전서는 구약과 신약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 “약”(約)은 “묶을 약” 혹은 “약속 약”자입니다. 따라서 구약이란 옛 약속이고, 신약이란 새 약속입니다. 그러면 구약 곧 옛 약속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실 예수님에 대한 약속”이란 뜻입니다. 신약 곧 새 약속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한 약속”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 연구를 통해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고,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한 확신이 강해지고, 그분을 맞기 위해 변화되고 성결한 삶을 살게 된다면 성경을 제대로 연구한 것입니다.
둘째, 성경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이것은 성경개요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구약과 신약 성경은 둘 다 동일한 주제를 따라 동일한 방식으로 편집되었습니다. 우선 구약의 모세 5경 즉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는 “이스라엘의 시작”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약의 4복음서 즉 마태복음부터 요한복음까지는 “교회의 시작”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또 구약의 역사서들 즉 여호수아부터 에스더까지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약의 역사서 곧 사도행전도 “교회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구약의 시가서들 곧 욥기부터 아가서까지는 “이스라엘의 문학”들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약의 서신들 곧 로마서부터 유다서까지는 “교회의 문학”들입니다.
그리고 구약의 선지서들 곧 이사야부터 말라기까지는 “이스라엘의 예언”이고, 신약의 묵시서인 요한계시록은 “교회의 예언”입니다. 여러분이 이 도표를 보시면 한 눈에 성경 전체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쉽게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의 구성
구약(이스라엘)                신약(교회)
모세 5경(창-신) --- 시작 --- 4복음서(마-요)
역사서(수-에)    --- 역사 --- 역사서(행)
시가서(욥-아)    --- 문학 --- 서신서(롬-유)
선지서(사-말)    --- 예언 --- 묵시서(계)

셋째, 성경의 개요입니다. 성경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는 각각 어떤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내용이 매우 길지만 전체 내용을 간단히 요약할 수 있습니다.
먼저 성경의 첫 두 장, 곧 창세기 1장과 2장은 “지구의 창조”에 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그런데 성경의 맨 뒤에서 두 장, 곧 요한계시록 21장과 22장은 “지구의 재 창조”에 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1절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 21:1). 매우 흥미롭지 않습니까?
그 다음에 세 번째 장인 창세기 3장은 “죄의 시작”에 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 1절에 죄의 창시자인 옛 뱀 곧 사단이 등장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창 3:1). 그런데 성경의 뒤에서 세 번째 장인 요한계시록 20장은 “죄의 소멸”에 관해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0절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계 20:10). 죄의 창시자인 사단과 악인들이 영원히 소멸될 것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나머지 창세기 4장부터 요한계시록 19장까지는 어떤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는가? 그것은 “선악 간 대쟁투”에 관한 기록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4장을 펴면 악을 대표하는 가인이 선을 대표하는 아벨을 죽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후로 인류의 역사는 언제나 악이 선을 박해하고 승리하는 것처럼 전개되어 왔습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요한계시록 6장 9-10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계 6:9-10)
그러나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 예수께서 나타나심으로 전세는 역전됩니다. 그 모습을 요한계시록 19장 11절에 이렇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계 19:11)
결국 예수님의 개입 곧 재림으로 선이 이기고 승리하게 된다는 것이 선악 간 대쟁투의 결론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끝까지 읽으면 현재 당하는 손실과 박해와 중상모략과 고통을 견디고 이길 수 있는 희망과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성경의 개요
┌  창 1, 2장          - 지구의 창조
│┌  창 3장          - 죄의 시작
││┌  창 4장      - 선악 간 대쟁투
││└  계 19장
│└  계 19장        - 죄의 소멸
└  계 21, 22장      - 지구의 재 창조

이 도표를 보시면 성경 전체의 개요를 한 눈에 알 수 있는데, 흥미로운 것은 성경전체 이야기가 이스라엘 문학의 특징인 교차대구법과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문학이 잃어버린 낙원을 회복할 것에 대한 구속의 약속에 따라 이루어지고 발전해 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3. 성경을 연구하는 방법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성경을 연구해야 합니까? 우리가 성경을 연구할 때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을 잘못 연구하면 신앙이 빗나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사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경고합니다.
베드로후서 3장 16절에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6)
그러므로 성경을 연구할 때,
첫째, 먼저 두 세 차례 성경을 통독하는 것입니다. 앞에 말씀드린 것을 염두에 두고 처음부터 끝까지 두 세 차례 통독하고 나면 성경 전체의 흐름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즉 나무를 보기 전에 먼저 숲을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둘째, 문화적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며 연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11장에는 공중 예배 때 기도나 말씀을 전하는 여자는 반드시 머리에 수건을 쓰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교파에서는 오늘날도 모든 여자들이 예배당에 들어갈 때 반드시 수건을 쓰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기혼녀들이 외출할 때 머리를 가리는 풍습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당시 밖에서 머리를 가리지 않고 다니는 여성은 아이들이나 혹은 성매매 여성들이었습니다. 이러한 당시 문화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도 문자대로 수건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발을 벗는 문제도 그렇습니다. 출애굽기 3장 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고 명령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오늘날도 교회에 반드시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중동에는 지금도 신발을 벗어 거룩한 장소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관습이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이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옛 성전이 있던 “오마르 사원” 일명 “황금 돔”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신발을 벗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시 관습에 따라 모세에게 신발을 벗으라고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성경해설자도 이것이 시대를 초월한 원칙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장소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경의를 표해야 한다는 원칙은 변치 않지만, 경의를 표현하는 방식은 나라와 시대에 따라 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 성경을 읽기 전에 기도함으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라.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 우리가 성령의 도우심을 받는 것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넷째, 말씀을 하나님의 실제적인 음성으로 받아들여라.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1장 21절에서 “예언은” 여기 예언은 하나님의 계시를 의미합니다.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1)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선지자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하나님의 실제 음성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학문적으로 접근하고, 분석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결국 성경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게 되고, 신앙에도 큰 손실을 당하게 됩니다.
다섯 째, 자기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읽어라. 어떤 사람은 자기가 나름대로 어떤 이론을 세워놓고, 그 이론을 입증하기 위해 성경을 인용합니다. 그리고 자기 이론에 반하는 내용이 나오면 간과하거나, 엉뚱한 해석을 하거나, 심지어 이 내용을 기록할 때는 선지자가 아직 신앙적 기초가 없어서 잘못 기록했다는 식으로 억지 주장을 합니다. 그것은 매우 사악한 것이며, 결국 정로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여섯 째, 매일 조금씩 규칙적으로 읽어라. 운동도 일주일 중 하루나 이틀 몰아서 하는 것보다 매일 조금씩 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합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정해진 시간에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을 때, 그 성경이 실제적으로 내 발의 등이 되고, 내 길의 내버게이션이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로, 생애에 도움이 되는 성경구절을 암송하라. 그것은 시험이나 유혹이 올 때 도움이 됩니다. 마지막 날의 사건들, 67쪽입니다. “성경 말씀을 암송하라 그래서 사단이 유혹을 가지고 찾아올 때 “기록하였으되” 라는 말로 곧바로 대항하도록 하라. 이것은 우리 주님이 시험에 대처하시고 그것을 물리치신 방법이다.“(RH, 1888. 4. 10; 사건, 67)
또 언젠가 성경을 빼앗기게 되더라도 우리는 성경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게 됩니다.
마지막 날 사건들, 67쪽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록된 말씀을 빼앗길 때가 올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이 기억 속에 새겨진다면 아무도 그것을 빼앗지 못할 것이다.”(MR 760, 24, 사건, 67)

마지막으로 한 이야기를 하고 마치겠습니다.
스페인에 비도 마티라는 한 대학원생이 철학박사 학위를 위한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도서관에 가서 별로 알려지지 않은 18세기의 스페인 철학자 히에로의 논문을 찾았습니다. 한참 후 그는 간신히 얄팍한 히에로의 논문집을 찾아냈습니다. 몇 장을 넘기다가 그는 1741년 봄에 기록한 한 종이 쪽지를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은 저자인 히에로의 유언장이었는데, 그 색바랜 유언장에는 다음의 글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 책을 맨 처음 찾아 공부하는 사람에게 유언장에 기재된 재산을 모두 주겠다.”
누구도 거들떠 보지 않았던 히에로의 논문 안에는 엄청난 재산의 상속권이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스페인 법정은 유언장대로 마티에게 히에로의 전 재산을 상속하도록 판결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행운의 책이 여러분 손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앞에서도 읽었습니다만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5장 39절에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유산 몇 푼이 아니라 영생을 상속받을 수 있는 행운의 책입니다. 성경을 펴서 읽으십시오. 인생의 내버게이션을 켜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에 따라 산다면 성경은 여러분의 삶의 등이 되고, 안내자가 되고, 마침내 영생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박성하 / 로뎀아카데미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