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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글은 필자가 전에 각종 잡지에 쓴 것을 옮긴 것입니다.

 

늙어가는 것에 대하여

 

수학여행을 떠나는 우리 일행들로 버스 안이 떠들썩해졌다. 45년 전 이야기이다. 국민학교 6학년 때 난생 처음으로 2박3일간 수학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5학년 때 낙향하시는 부친을 따라 읍내에서 큰 고개를 세 개나 넘어 한 작은 산골 마을로 이사했다. 전학 간 학교는 전체 학생이 이백 명이 채 못 되었다. 우리 학년 전체가 30명 정도 되었는데 그 중에서 20명 정도가 수학여행을 떠났다. 우리는 허리에 도시락 보자기를 둘러매고, 마을 앞으로 하루에 두 번 다니는 버스를 타고 면소재지로 가서 거기서 목적지로 가는 버스를 갈아탔다. 나를 비롯해 대부분 설레임으로 지난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했지만 부푼 가슴을 억제할 수가 없어 마땅 떠들어 댔다. 그때 중절모를 쓰고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온 할아버지 한 분이 버스에 올라오더니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나와 친구는 학교에서 배운대로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아버지, 여기 앉으세요.”
할아버지는 천천히 말씀하셨다.
“수학여행을 가는구나. 괜찮다. 니들이나 앉아 가거라.”
“아니에요. 여기 앉으세요.”
우리가 소매를 끌며 강권하자, 할아버지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다.
“난 살만큼 살았지만 니네들은 아직 고생할 날이 멀었어. 어여 앉아서 편히 가거라.”
그리고 우리 등을 떼밀어 기어코 자리에 앉혔다.
몇 년 전부터 문득 그 할아버지의 잔잔한 눈주름이 생각나는 건 귀가 순해져 남의 의견을 다 들을 수 있게 된다는 이순(耳順)이 가까운 때문일까.

■ 소갈머리가 없는 사람
10여 년 전, 송년회 시간이었다. 아내와 강당 맨 뒤에 앉아 있는데 문득 맨 앞자리에 앉은 한 선배의 머리가 눈에 띄었다.
“여보, 저 선배 뒤통수 머리 빠진 거 봐. 나도 저렇게 빠지면 어떡하지?”
아내가 피식 웃으며 귀에 대고 속삭였다.
“당신이 더 빠졌어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뭔 소리여. 그럴 리가 있나?”
아내가 팔꿈치로 옆구리를 치며 말했다.
“쉿, 옆 사람 들어요.”
집에 돌아오자 마자 거울 앞에 서서 말했다.
“보라구. 아직 그 선배보다 훨씬 숱이 많잖아.”
아내가 손거울을 주며 말했다.
“돌아서서 뒤를 비춰보세요.”
한참을 이리저리 노력한 끝에 손거울에 비친 내 뒤통수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혼자 중얼거렸다.
“소갈머리 없는 사람 하나 더 늘었구만.”
뒤에서 아내가 웃다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 어떻게 늙어갈까
사람은 삼면경(三面鏡) 즉 세 가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에서 늙음을 발견한다고 한다. 첫째 거울은 기력을 잃고 노쇠해진 노부모의 모습이고, 둘째 거울은 성장하여 곁을 떠나는 자녀의 모습이고, 셋째 거울은 전과 다른 자신의 모습이다. 늙음은 어느 날 문득 발견된다. 거울을 보다가 미간과 눈가에서 발견되기도 하고, 우연히 들여다 본 탄력 잃은 손등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원불교의 교조 소태산은 인생을, 천심을 소유한 유년기, 기운이 넘치는 청년기, 그리고 수양으로 늙어가는 노년기로 분류하였다. 그리고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유년기에는 문자를 배우게 하고, 장년기에는 도학을 배우며 제도사업에 노력하게 하고, 노년기에는 경치 좋은 한적한 곳에 들어가서 세상의 애착 탐착을 다 여의고 생사 대사를 연마하게 한다.”고 하였다. 즉 노년기를 낡아가는 시기가 아닌 자신을 곱게 빗질하는 시기로 본 것이다.
처음 나 자신이 늙어가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 기분은 묘했다. 그리고 가끔 늙어가는 것에 생각한다. 어떻게 늙어가야 하나…. 늙어가는 것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어린시절 수학여행에서 만난 그 할아버지 생각이 난다. 노구(老軀)에도 불구하고 끝내 자리를 사양하던 그 넉넉함은 어디서 나왔을까? 나 또한 그렇게 늙어갈 수 있을까?
김영수 님은 <고독이 사랑에 닿을 때>에서 “늙고 있다는 것이 기쁨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뒤를 돌아보면서 덧없음의 눈물만 흘리거나 남을 원망하면서 삶에 대한 허무감에 젖지 않고,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성스러운 존재와, 가족들과 이웃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일구면서 미소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로 기쁜 일이다.”라고 하였다.
늙음에 대한 이러한 초연함은 이해인 님의 시집 <작은 위로>에 실린 “어느 노인의 고백”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하루 종일 창밖을 내다보는 일이 나의 일과가 되었습니다. 누가 오지 않아도 창이 있어 고맙고 하늘도 구름도 바람도 벗이 됩니다. …이왕이면 외로움도 눈부시도록 가끔은 음악을 듣습니다. 이 세상을 떠나기 전 내가 용서할 일도 용서받을 일도 참 많지만 너무 조바심 하거나 걱정하진 않기로 합니다. …고요하고 고요하게 하나의 노래처럼 한 잎의 풀잎처럼 사라질 수 있다면 난 잊혀져도 행복할 거예요.”
늙어간다고 해서 반드시 낡아가는 것은 아니다. “늙음”과 “낡음”은 동의어가 아니다. 비록 글자로는 한 획 차이밖에 없지만, 그 품은 뜻은 정반대일 수 있다. 늙음과 낡음이 함께 만나면 허무와 절망밖에 남지 않는다. 그러나 늙어도 낡지 않는 삶이 있다. 몸은 늙어도 마음과 인격은 더욱 새로워질 수 있다. 아름답게 늙어가는 비결은 겉은 비록 낡아 가도 속은 날로 새로워지는 것이다. 몸은 늙어가지만, 날마다 마음만은 새로워진다면 평생을 살아도 늙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날마다 새로워지는 삶의 비결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했다.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4:16, 5:17).

■ 낙조(落照)가 더 아름답다
6월 신록의 푸르름과 정동진의 일출만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10월의 단풍과 안면도 앞바다에 내려앉은 낙조 또한 아름답기 그지없다. 오십 줄에 들어 선 친구들의 히끗히끗한 머리칼과 적당히 주름잡힌 눈가를 보고 있노라면 인생의 역정과 노련함이 느껴져서 좋다.
며칠 전, 천상병 님의 “귀천”(歸天)이라는 시를 읽는데 마지막 단에서 문득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단언하건대 깊어진 가을 때문만은 아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박성하 / 로뎀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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