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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23 11:45

상처(傷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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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글은 필자가 전에 각종 잡지에 쓴 것이나 설교문을 옮긴 것입니다.

 

상처(傷處)

왼손 검지 손가락에 섬뜩한 통증이 스쳐 지나갔다. 벌어진 상처 사이로 허연 속살이 보이더니 이내 붉은 피가 솟아올랐다. 초등학교에 2학년 무렵의 일이었다.
연을 만들기 위해 대나무를 가늘게 쪼갤 방법을 찾던 나는, 아버지가 사용하시는 주머니칼이 생각났다. 아버지는 절대로 만지지 말라고 주의를 주셨지만, 나는 몰래 그 칼을 가지고 나와 집 뒷켠으로 갔다. 왼손으로 대나무를 쥐고 오른손으로 칼을 힘껏 누르자 갑자기 대나무가 쪼개지면서 왼손 검지 손가락에 예리한 칼날이 대각선으로 파고 들었다. 통증도 통증이지만 부모님께 혼날 것이 더 걱정이었다. 저녁 먹을 시간이 되었지만 상처가 들킬까봐 배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윗방으로 가서 손가락을 쥔 채 잠을 청했다. 가족들이 후루룩 거리며 수제비를 먹는 소리에 내 뱃속에서는 논고랑물 빠지는 소리가 났다.
“아이고, 이놈, 배가 아프다더니 손가락 때문이구먼.”
얼마나 잤을까. 혀를 차는 소리에 잠을 깨니 어머니가 내 다친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살펴보고 계셨다. 다친 손가락에 아까징끼(머큐럼)를 바르고 헝겊으로 동여맨 후 어머니는 다시 부엌으로 가셔서 수제비를 끓여오셨다. 지금도 내 검지 손가락에는 그때의 흔적이 선명히 남아 있다.

■ 나이테
큰 나무들을 잘라보면 나이테가 보인다. 나이테는 기후의 변화 때문에 생겨난다. 봄부터 여름까지 나무가 쑥쑥 자라는 시기에는 목재의 색깔이 연하고 폭도 넓다가, 가을부터 겨울을 견디는 동안에는 아주 천천히 자라나 조직이 치밀해지고 색깔이 진하며 폭도 좁아진다. 학자들은 이 나이테에서 그 나무가 살아온 역사를 읽을 수 있다고 한다. 나이테가 생겨나는 간격, 색깔, 흔적 같은 것을 보면 그 지역에 언제 가뭄이 들고 산불이 났는지, 혹은 곤충의 침입을 받았는지를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도 자신의 몸에서 지나온 삶의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흔적들마다 사연들이 있게 마련이다. 어떤 것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것도 있지만, 어떤 것은 추억거리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상처는 마음에도 있다. 그리고 그 생채기로 인해 삶이 굴곡지고 고통을 받기도 한다.

■ 상한 감정의 통증
연애 끝에 결혼하여 세 살된 딸과 함께 행복하게 살던 30대 중반의 한 여인이 있었다. 어느 날, 남편이 퇴근하여 현관문을 열자 여느 날처럼 딸이 달려가 아빠 품에 안겼다. 순간 자신도 모르게 아이를 남편에게서 나꿔챘다. 남편도 놀라고 본인도 놀랐다.
그녀는 8살 되던 해 아버지로부터 성폭력을 당했다. 잊고 살았던 기억이 남편과 딸아이를 통해 되살아난 것이다. 이후 밤마다 악몽을 꾸고, 죄책감에 시달렸다.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거울 앞에 앉아 한없이 울었다. 아버지를 닮은 부분을 모두 도려내고 싶었다. 결국 남편과 이혼했고 우울증 치료까지 받아야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온 청년이 있었다. 그는 시력이 나빠 10미터 앞도 잘 분간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번번이 직장에서 쫓겨났다. 그는 인정이 없는 세상이 살기 싫어졌다. 죽을 결심을 한 그는 승용차를 훔쳐 여의도 광장으로 향했다.
“여의도 광장에서 행복하게 뛰어노는 사람들의 모습이 미웠습니다. 광장에서 놀고 있는 사람들을 자동차로 싹 쓸어버리고 싶었습니다. 나 같은 놈이 살아봐야 별 수 있겠습니까. 진작 죽을 결심을 했지만 혼자죽긴 정말 억울했습니다.”
1991년의 이 광란의 질주로 2명이 죽고 17명이 부상했다.

■ 상한 감정의 치유
남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은 대개 받은 상처가 많은 사람이다. 상한 감정의 특성은 자신의 가치와 중요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열등의식, 항상 애쓰고 힘쓰나 만족하지 못하고 죄의식을 느끼는 완전주의, 다른 사람을 지나치게 의식하여 상처를 쉽게 받는 예민성 등으로 나타난다. 상한 감정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이 받은 상처를 무마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일을 예사로 행하기도 한다. 아픈 상처를 모면하기 위해 강인함과 날카로움으로 자신을 위장하기 때문이다.
상한 감정을 치유하려면 가장 먼저 내가 상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둘째는 그 사건이 일어났던 것은 사실이지만 나의 본질에 직접 어떤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실제로 모욕이 나를 비참하게 하거나 성폭행이 나를 더럽게 하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사건 자체보다 그 사건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느냐 하는 것이다. 셋째는 내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나를 향한 하나님의 평가나 사랑은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를 지으신, 어머니 같은 분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가 늙어 백발이 될 때까지 너희 하나님이 되어 너희를 보살필 것이다. 내가 너희를 만들었으니 너희를 돌보고 보살필 것이며 너희를 도와 주고 구해 주겠다.(이사야 46장 4절. 현대어 성경)

■ 아름다운 용서
2006년 3월, 한 일간지에 이런 요지의 기사가 실렸다.
서윤범(73) 할머니는 지난 1991년 서울 여의도 광장 질주 사건으로 6살 된 손자를 잃었다.
손자를 거의 혼자 키우다시피 한 서 할머니는 김씨를 용서할 수 없었다. 심지어 손자를 그 곳에 데리고 간 며느리까지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며느리 또한 자식을 잃은 어머니였다. 며느리에 대한 원망을 걷어내자, 이번엔 가해자가 어떤 인간인지 알고 싶어졌다. 김씨가 사형 선고를 받은 날 검사실에서 만났다. 김씨의 배경을 알게 되면서 서 할머니는 선처를 탄원했다. 그러나 이후 남편이 세상을 뜨고 며느리도 암으로 고생하다 숨지는 불행이 겹치자, 마음이 다시 돌아섰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용서와 분노 사이를 오갔다. 시간이 지나며 김씨와 편지를 주고받게 됐다. 결국 할머니는 김씨를 용서하고 양자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아침마다 그를 살려달라고 기도했다. 김씨는 구치소에서 세례를 받은 뒤, 1997년 12월 사형이 집행됐다. 서 할머니는 “이미 10년이 지난 일이라 억지로 잊으려 하지 않아도 마음이 편안하다”고 말했다.

나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을 용서하라. 용서는 상대방이 아니라 자신을 자유하게 하는 것이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에베소서 4장 32절)

박성하 / 로뎀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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