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제스처

by 로뎀 posted May 2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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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제스처

 

가인(Cain)과 아벨(Abel)은 형제였으나 성격이나 기질은 완전히 달랐다. 가인은 농사를 지었으나 아벨은 양을 쳤다. 가인은 반항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었으나, 아벨은 순종적이었다.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때도, 가인은 농산물을 바쳤고 아벨은 속죄를 나타내는 양과 그 기름을 드렸다.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거절하셨다. 가인은 안색이 변할 정도로 화를 냈다. 하나님께서는 죄가 너를 다스리고 싶어하지만,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경고하셨다. 그러나 끝내 화를 참지 못한 가인은 아벨을 들로 유인해 살해했다. 인류 역사상 첫 살인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가인과아벨.jpg

 

전쟁으로 점철된 인류의 역사

미국 역사학자 월리암 듀란트는 역사에 기록된 3421년 중 전쟁이 없었던 해는 268년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가인의 살인사건 이후 인간은 끊임없이 싸우고 전쟁을 벌여왔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버트란드 러셀도 인류는 역사의 93%는 전쟁을 했고, 나머지 7% 기간만이 평화로운 시기였다.”그 평화도 다음 전쟁을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고 개탄했다.

두 차례의 참혹한 세계대전을 겪은 후, 인류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유엔을 비롯한 여러 국제기구들을 만들고 다양한 방법으로 노력해 왔다. 그러나 <왜 인간은 전쟁을 하는가>라는 책을 쓴 히로세 다카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베트남 전쟁처럼 3천 일이 넘는 장기전부터 단 하루의 테러에 이르기까지 지구상에 전쟁이 없는 날이 없었다고 말했다.

왜전쟁.jpg

전쟁은 나라나 인종 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동족끼리도 진보와 보수, 좌와 우, 동과 서, 남과 북, 구세대와 신세대, 남성과 여성으로 나뉘어 상대방을 공격하고 독설과 악담을 주고받는다. 사회의 갈등을 중재해야할 정당들은 오히려 진영의 증오심을 자극해 정치 수단으로 삼고 있다. TV 드라마는 시청률을 끌어 올리기 위해 가족 간 불화와 불신을 부추긴다. 그뿐만이 아니다. 디지털시대가 되면서 인터넷이나 SNS 등을 통해 지금도 매일 증오심을 부추기고, 편을 가르고, 헐뜯고, 명예를 훼손하며, 인격살인을 서슴치 않는 사람들이 있다. 국가나 인종, 집단, 개인을 가리지 않고 또 다른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작년에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한목협)에서 지앤컴리서치(JI&COM)에 의뢰해 만 19세 이상 성인 남녀 5천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우리나라에 개신교인 비율이 20.3%, 불교인이 19.6%, 천주교인 6.4%로 나타났다. 세 종교인 비율만 해도 46.3%이고, 전체 종교인 비율은 46.6%로 나타났다. 5년 전(55.1%)에 비해 8.5%포인트 낮아졌다 해도 결코 적은 비율은 아니다. 그런데도 사회적 갈등은 더 커지고 상대방에 대한 증오는 날로 깊어지고 있는 것이다.

 

소극적 평화에서 적극적 평화로

작년에 유네스코는 <평화를 향한 긴 여정: 예방의 문화를 향해>(Long Walk of Peace: Towards a Culture of Prevention)라는 보고서를 내놨다. 이 보고서는 전쟁이 없는 상태, 즉 국가와 국가 간, 혹은 사회 내에서 직접적 폭력이 해소된 상태를 평화로 간주하는 개념을 소극적 평화’(negative peace)로 정의했다. 적대국들이 서로 핵무기 등 치명적인 무기를 통해 유지하고 있는 세력의 균형이나, 강대국이 힘으로 약소국을 눌러 평화를 유지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것을 진정한 평화라 할 수는 없다.

이에 따라 1969년에 노르웨이의 학자 요한 갈퉁(Johan Galtung)적극적 평화’(positive peace) 개념을 처음 주창했다. 소극적 평화가 전쟁과 폭력을 인류사의 상수로 보는데 비해, 적극적 평화는 전쟁과 폭력을 일탈’, 더 나아가 미친 짓’(aberration)으로 간주한다. 전쟁이 아닌 평화가 우리 인류의 일상적이고 자연스럽고 근본적인 상태라는 것이다.1)

히로세 다카시 역시 전쟁은 집단 보다는 개인적 의지이며, 모든 인류가 아니라 권력에 의해 인간을 지배하려고 하는 한 줌의 야심가들에 의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사람들을 적을 만들어 내는 놀라운 기질을 가진 클라우제비츠형, 평화를 지향하는 바보 이반형으로 나눈다. 클라우제비츠형 인간에게는 늘 적이 필요하지만, 바보 이반에게는 국경도 진영도 의미가 없고 싸울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클라우제비츠형 인간을 판별할 수 있어야 하며, 적을 만들어내지 않음으로써 평화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2)

 

교황의 호소

지난 2, 가톨릭의 수장인 프란치스코 교황이 역사상 처음으로 이슬람 발상지인 아라비아반도를 방문했다. 아시안컵 축구 경기가 열렸던 아부다비의 자이드 스포츠시티 스타디움에서 열린 미사에는 100여 개 국적의 가톨릭 신자 17만여 명이 운집했으며, 무슬림도 4천 명 정도 참석했다.

교황은 마태복음 51-12절의 팔복을 중심으로 의미심장한 연설을 했다. 그는 어떠한 폭력도 종교를 명분으로 정당화할 수는 없으며 전쟁은 비참함만을 낳으며 무기는 죽음만을 낳는다고 강조했다. 또한 거기 모인 여러 종교 지도자들에게 무력의 논리에 맞서 종교끼리 서로 손잡지 않으면 인류의 미래는 위험해진다세계 종교를 대표하는 우리는 인류 박애 정신으로 전쟁이라는 단어를 허용하지 말고, 가식을 버리고 용기와 담대함으로써 인류라는 가족이 조화, 희망, 평화로 가는 길을 만들 수 있도록 더욱 힘쓰자고 호소했다.

 

바람을 붙잡으라!

사도 요한은 천사 넷이, 땅의 네 모퉁이에 서서 땅의 네 바람을 붙잡아서 땅이나 바다나 모든 나무에 바람이 불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을 보았다(7:1). 요한계시록 7장은 6장 마지막의 그들(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이 환상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환난에 대한 준비를 마칠 때까지 요한계시록 6장에 묘사된 두려운 일들을 일시적으로 붙들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4 Angels holding the 4 Winds.jpg

 

평화를 위한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머지않아 인류는 잔인한 박해와 파괴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요한계시록 13장은 지금은 평화의 제스처를 보내는 정치, 종교 세력들이 돌변하여 가해자가 될 것을 예언한다.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13:15). 그리스도인들은 바람을 붙잡는 천사, 곧 적극적으로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흠을 찾아내고, 폭로하고, 편을 가르고, 그것을 정의나 개혁으로 포장하는 클라우제비츠형 인간들에게서 돌아서야 한다.

오늘 다시 한번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를 구하는 기도를 읽어보자.

주여! 나를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 어두움에 빛을 /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 가져 오는 자 되게 하소서. //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1) https://www.unesco.or.kr/data/unesco_news/view/745/562/page/0?에서 발췌

2) 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1568267#cb 에서 발췌

 

박성하  / 로뎀아카데미 원장

시조, 2019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