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기해년 새해가 밝았다.
그런데 1월 1일이 과연 새해일까? 국립국어원에서는 ‘새해’를 ‘새로 시작하는 해’라고 정의한다. 본래 새해란 ‘새로운 해가 돋는다’는 뜻이다. 날짜는 보통 천문(天文)을 기준으로 정하기 때문이다.
고려시대부터 대한제국시대까지 동짓날 아침 조정 대신들과 관리들이 왕에게 축하 인사를 올리는 동지하례(冬至賀禮)가 있었다고 한다. 동지는 북반구에서 일 년 중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이다. 곧 기운이 음(陰)에서 양(陽)으로 바뀌기 시작하는 첫날이 바로 동지이며, 이것을 새로운 해가 돋는다고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동짓날 끓여먹는 동지팥죽에서 새알은 해를 상징하고, 팥죽의 붉은색은 양(陽) 기운을 상징했다.
역대 중국의 천자들은 나라를 세우면 통치력(統治曆)을 새로 제정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삼통(三統)이라 일컬어지는 하(夏), 상(商), 주(周)의 역법이다. 하(夏)나라는 인월(寅月) 곧 현재의 음력 1월을 정월(正月)로 삼았고, 상(商)나라는 축월(丑月, 12월), 주(周)나라는 자월(子月, 11월)을 정월로 삼았다. 새로운 왕조가 들어설 때마다 이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서 사용해 왔다.
과거 우리나라에서는 하(夏)나라의 역법을 채택하여, 첫 번째 달의 삭(朔)인 음력 1월 1일을 새해로 삼았다. 서기 488년 신라 비처(毗處) 왕 시절에도 설을 쇠었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시대에는 설이 9대 명절 중의 하나로, 조선시대에는 한식·단오·추석과 더불어 4대 명절로 지냈다.
로마는 처음엔 3월 25일을 새해로 경축했다고 한다. 그러다 기원전 46년, 율리우스력을 채택하면서 1월 1일이 새해의 첫날이 되었다.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그레고리력에서는 춘분을 3월 21일로 고정하고, 새해를 79일 전인 1월 1일로 잡고 있다.
우리나라는 1896년 을미개혁으로 양력이 도입되면서 양력 1월 1일이 새해가 되었다. 그런데 이 날은 천문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인위적으로 정한 날이다.
시간의 본질
어찌됐든 새해가 시작되었다. 지난해는 과거로 흘러가 버렸고, 우리는 새해를 맞이했다. 그런데 시간이란 무엇인가? 시간은 실재하는가? 또한 시간은 무한히 지속되는 것인가, 아니면 시간도 없어질 수 있는가?
고대 자연 철학자로부터 현대 철학자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시간의 정체를 알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하지만 아무도 시간에 대해 명쾌한 답변을 내놓은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히포의 어거스틴(Augustine, 354-430)은 “도대체 시간이 무엇인가? 아무도 묻는 이가 없으면 아는 듯 하다가도 막상 질문자에게 설명하려 하면 말문이 막히고 만다.”고 고백했다.
어거스틴은 플로티누스(Plotinus, 205-270)의 유출설에 반대해서 “무(無)로부터의 창조”를 주장했다. 고대 후기 그리스 철학자인 플로티누스는 세상 모든 만물이 일자(oneness, 신)의 넘침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어거스틴은 만일 만물이 일자로부터 흘러 나왔다면 만물 속에 신적인 요소가 함유되어 있을 것이고 이것은 결국 범신론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경계했다.
따라서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해 계시며,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은 영원자이며, 세계는 시간 안에 창조한 것이 아니라 시간과 함께 창조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시간은 세상과 같이 무(無)로부터 창조되었기 때문에 영원토록 무한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종말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간은 영원과 대조된다. 과거는 이미 흘러가 버려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으며, 현재는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곧장 과거로 흘러가 버린다. 시간은 잡아둘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시간 또한 세상과 마찬가지로 무(無)로부터 창조되었기 때문에 끊임없이 무로 돌아가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끊임없이 파괴되는 시간이 자기의 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영원에게로 향해야 한다. 영원에 매개될 때만이 시간이 무(無)로 와해되지 않고 자기의 동일성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시간이 영원 속에 매개된 역사적인 사건이 바로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다. 어거스틴은 “바라기는 ‘나 있는 곳에 그들도 있게 되기를 원한다’고 아버지께 기도한 그분(예수)이 우리를 그 곳으로 올리워 주기를 바랄 뿐이다.”라고 간구했다. 무상한 시간 속에서 무로 달려가는 인간이 무로 와해되지 않는 유일한 길은 성육하신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는 길이다. 바로 이것을 어거스틴은 믿음(fide)이라고 했다.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이 유한한 시간적 존재가 영원하신 분에게 나아갈 수 있고, 이로 인해 무로 돌아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자다가 깰 때
핵우주 연대학 및 항성진화 컴퓨터 모형에 따르면 태양은 지금으로부터 45억 6720만 년 전에 탄생했다고 한다. 태양의 수명이 약 123억 6500만 년이라고 하니까 남은 수명은 77억 9780만년이다. 지금 태양은 인간으로 치면 청장년기인 ‘주계열 단계’인데, 약 109억년 동안 지속될 것이라고 한다. 주계열 단계에서도 태양은 서서히 밝아지면서 표면 온도가 올라가게 되는데, 이로 인해 약 7억 년 내로 지구상에 어떤 생명체도 존재할 수 없게 된다. 동식물이 멸종된 지 1억 년도 채 안 돼서 지구표면은 끓는점에 도달하게 된다. 물은 산소와 수소로 분리된 후 수소는 우주공간으로 날아간다. 8억 년 내로 지구의 바닷물은 모두 증발하여 사라진다. 태양이 더 밝아지면 결국에는 지구에 있는 것이 다 타버리고 대기마저도 날아가 60억년 후 지구는 수성이나 달처럼 대기가 전혀 없는 행성으로 될 것이라고 한다.(위키백과, ‘태양’에서 발췌)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재림의 날을 예언하면서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2, 13)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컴퓨터가 지구가 끓는점에 도달할 것이라고 예측한 7억 년 후에 예수께서 재림하신다는 의미는 아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초자연적인 현상이며, 그의 임재로 지구에 대변동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세계는 무(無)로 달려가는 시간의 궤도에서 벗어나 영원 속에 매개될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다시는 노화나 죽음이 없을 것이다. 사도 요한은 거기서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과 “생명나무”(계 22:1, 2)를 보았다.
우리가 맞은 새해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한 해 더) 가까웠음이라”(롬 13:11)
박성하 / 로뎀아카데미 원장
시조, 2019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