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라는 이름의 폭력

by 로뎀 posted May 1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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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라는 이름의 폭력

 

2007년에 개봉한 이창동 감독의 밀양이라는 영화가 있다. 칸 영화제에서 주연 배우 전도연이 한국배우 최초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영화로 유명하다.

밀양.jpg

 

남편을 사별한 이신애(전도연)는 아들 준을 데리고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내려왔으나 아들이 유괴된 후 살해된다. 분노와 절망 중에 약사인 김 집사를 통해 신앙을 받아들인 신애는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용서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용서하기 위해 만난 그 살인범의 입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미 용서받고 평안하다는 말을 듣는 순간 그녀는 분노한다.

밀양2.png

나는 용서할 수 없다. 내가 용서하기 전에 하나님이 벌써 용서하셨는데 내가 어떻게 용서한단 말인가

신애는 자기보다 먼저 살인범을 용서한 하나님과 교회에 복수하려 한다. 예배 중 기도 시간에 방송실에 침입해 김추자의 거짓말이야라는 노래를 틀어댄다.

 

용서해 주지 않는 종의 비유

이 비유는 예수께서는 가버나움에 이르렀을 때 하신 것이다.

왕에게 1만 달란트를 빚진 자가 있었다. 당시 일반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1데나리온이었기 때문에, 1만 달란트는 6천만 데나리온이나 된다. 이것은 일반 노동자가 매일 번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16만년 동안 갚아야 하는 엄청난 돈이다. 왕은 그 종을 불쌍히 여겨 그 엄청난 빚을 모두 탕감해 주었다. 그런데 석방된 종은 자기에게 1백 데나리온 즉 100일 품삯을 빚진 자를 용서하지 않고 감옥에 넣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노하여 다시 그 종을 잡아들여 빚을 다 갚도록 투옥시켰다. 비유를 마치면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각각 진심으로 자기 형제자매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복음 1823-35)

 

용서의 힘

네덜란드의 코리 텐 붐(Corrie ten Boom, 1882-1983) 여사는 테레사(Teresa) 수녀와 더불어 20세기의 성녀라고 불리어진다. 그녀의 가족들은 네덜란드를 침공한 나치군들에게 쫓기는 유대인들을 돕기 위해, 집안에 가짜 벽을 만들어 숨겨주다 발각되어 독일에서 제일 악질적이라고 알려진 라벤슨부르크(Ravensbrück) 수용소에 끌려갔다.

코리는 거기서 아주 뛰어난 신앙을 가진 언니 베시(Betsie)와 그녀의 아버지가 수용소의 열악한 환경과 나치들의 혹독한 고문에 못이겨 죽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코리 역시 목숨을 건 고문을 당했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전쟁이 끝난 1945년에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 후 신학을 마친 코리는 1946년 독일로 돌아가 곳곳을 다니며 원수를 사랑하라는 제목의 간증집회를 했다.

어느 날, 독일의 한 마을에서 간증을 마치고 인사를 하는데, 자기를 고문하고 언니의 목숨을 앗아갔던 간수가 다가왔다. 코리는 그 순간을 일기장(자서전)에 이렇게 기록했다.

그 순간 내 심장은 얼어붙는 것 같았다. 나는 한마디로 하나님, 저 인간만은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코리야, 용서하거라.”

하나님, 저 인간만은 용서할 수 없어요.”

마침내 그 원수가 코리 앞에 섰다. 순간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네가 저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겠느냐 안 하겠느냐를 묻고 있는 것이다. 용서하라는 것은 나의 명령인데, 내 명령에 순종하겠느냐 안하겠느냐?”

코리는 일기장에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과 느낌이 없이 다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내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손을 내밀어 그를 안는 순간 주께서 내 마음속에 그를 진심으로 용서할 수 마음을 부어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코리는 그 일기장의 마지막에 이런 인상 깊은 글을 남겼다.

명령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은 성령에 의지한 순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용서의 권리

영화 밀양에서 신애가 분노한 것은 살인자의 태도에서 자신의 용서의 권리를 빼앗겼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용서는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의 몫이다. 피해자는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받고 위로와 치유와 회복이 필요한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칫하면 피해자에게 예수님의 명령이나 성경절을 인용해 용서하라고 강요하기 십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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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애가 살인자를 용서하기 위해서는 먼저 살인자가 용서를 구해야 한다. “죄 지은 자를 용서하라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먼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라는 가르침이기도 한 것이다. 가해자가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는데, 피해자에게만 용서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을 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피해자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12:19)

원수 갚는 일은 하나님의 몫이니 손을 떼라는 것이다. 법구경에 녹은 쇠에서 나지만, 그 쇠를 먹는다.”고 하였다. 분노와 적개심은 피해자에게서 나지만, 그것이 또한 피해자를 해치는 것이다.

용서란 상대방이 나에게 끼친 모욕, 무시, 상처, 손실, 거부 등에 대해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고 일체의 보상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을 과거에 들러붙게 하며 불행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할 만큼 어질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자신의 건강과 평안을 위해 원수를 용서하고 잊어버려야 한다.

 

박성하 / 로뎀아카데미 원장

시조, 2016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