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이 된 양
지난 2월 4일,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는 또 다시 어린아이가 인질을 참수하는 영상을 공개했다. 지난 2015년에 이어 두 번째다. 열 살 남짓한 흑인 소년이 오렌지색 죄수복을 입은 시리아 반군 소속으로 보이는 남성을 숲 속으로 끌고 가 무릎을 꿇린 뒤 참수하는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전율이 느껴진다.
작년 1월 13일에 열 살쯤으로 보이는 어린 남자아이가 포로로 잡힌 러시아 스파이 두 명을 총살하는 영상이 공개된바 있다. 11월에는 시리아 어린이 200여명을 총살시키는 역겨운 영상도 공개됐다. 이 영상을 본 누리꾼들은 “아무런 잘못도 없는 어린아이는 왜 죽이는 것인가? 저들이 믿는 신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며 분개했다. 지난해 6월에는 수감 중이었던 포로들을 물속에 가둬 익사시키는 등 잔인한 방법으로 공개 처형한 바 있다.
IS 잔혹성의 배경
IS의 만행의 뿌리는 영국의 팔레스타인 통치가 만료되고, 이스라엘이 건국을 선언한 194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스라엘에 맞서 아랍 국가들이 팔레스타인연합국가를 창설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에 개입하면서 중동전쟁이 시작되었다. IS는 중동전쟁이 키운 이슬람주의 세력의 결정판이며, 중동 현대사의 원죄라 할 수 있다. 1차 중동전쟁 발발 전인 1948년 4월 9일, 예루살렘 서쪽 5km 지점에 위치한 ‘데이르 야신’ 마을을 공격한 이스라엘의 ‘이르군’(Irgun, 히브리어로 ‘민족군사조직’을 의미)은 254명의 마을 주민들을 남여노소 가리지 않고 살해했다. 뿐만 아니라 아동과 여성을 포함한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포로로 잡아 서예루살렘 거리를 행진하게 하면서, 이들에게 침을 뱉고 돌을 던졌다.
이 사건은 결국 1차 중동전쟁을 촉발했고, 오늘날 IS의 잔혹한 보복의 배경이 된다. IS는 점령한 지역의 사람들을 집단 처형하고, 서방 기자 등을 인질로 잡아 참수했다. 점령지 주민들의 생이빨을 뽑고, 폭탄 위에 강제로 앉히고 터트려 죽이기도 했다. 또한 펄펄 끓는 기름이 가득찬 통에 손을 집어넣게 하기도 했다. 70여 년 전 자신들이 당한 것 보다 훨씬 잔혹한 보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단에서 박해자로
기독교는 초기에 유대교 지도자들에 의해 “나사렛 이단”으로 정죄되고 박해를 받았다(사도행전 24:5, 14). 34년과 70년에 스데반의 순교와 예루살렘 멸망으로 원시초대교회는 소아시아, 시리아, 마케도니아, 그리스, 로마 그리고 이집트로 흩어졌다. 초기 교인들은 주로 유대교에서 전향한 사람들이 많았으나 점차 이방인들, 특히 희랍사상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특히 2세기에 들어 교회 중심이 로마교회로 넘어가면서 스토아, 아리스토텔레스, 피타고라스, 플라톤 등의 이교적 철학을 중심으로 형성된 사상체계가 순수신학을 대체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 이후 정치와 손을 잡은 로마교회는 “정통”의 지위를 확보한 후 자신들과 신념이 다른 교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12세기 프랑스 남부에서 시작된 종교재판과 가톨릭교회의 박해로 약 5000만명의 개신교인들이 학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1517년 종교개혁으로 탄생한 개신교 역시 가톨릭에 의해 이단으로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칼빈 역시 제네바 신정(神政) 기간의 일부인 1542년부터 4년간 58명을 이단으로 정죄하여 처형하였으며 76명을 제네바에서 추방했다.
이러한 비극적인 역사는 미국에서도 반복되었다.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에 정착한 청교도들은 그들의 과거를 잊고 자신들과 교리가 다른 침례교도들을 이단으로 정죄하여 추방하거나 교수형에 처했다. 보다 못해 영국 찰스2세가 1662년 이를 법으로 금지할 정도였다.
흉보다 닮는다
작년 연말, 너무 배가 고파 가스배관을 타고 탈출하여 인근 슈퍼마켓에서 빵을 훔쳐 먹다 발각된 A양(11) 사건으로 사회는 큰 충격을 받았다. 맨발로 발견된 A양은 120㎝의 키에 몸무게는 16㎏에 불과했고, 늑골이 골절되고 팔, 다리에 멍이 선명한 상태였다. 경찰 조사에서 A양을 학대한 아버지 B(32)씨 역시 유년 시절 부모에게 비슷한 학대를 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폭력과 학대가 대물림된 것이다.
우리나라 속담 가운데 “못된 시어머니 닮는다.”는 말이 있다. 못된 시어머니를 만나 호된 시집살이를 한 며느리는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다짐하지만, 나이가 들면 자신도 모르게 며느리에게 똑같이 못된 시어머니 노릇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흉보다 닮는다”는 말도 있다. 남을 흉볼수록 자신도 똑같은 사람이 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평범하게 살아온 사람보다 학대와 박해, 소외를 당한 사람들이 후일 더 잔인한 가해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는 <선악의 저편>에서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중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봤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볼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피해의식은 보복심을 자극하지만, 보복심은 양을 괴물로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최종 피해자는 자신이다. ‘법구경’에 “녹은 쇠에서 생긴 것인데 점점 그 쇠를 먹는다.”고 하였다. 분노, 피해의식, 보복심은 피해자를 더 가혹한 가해자로 만든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누가복음 17장 3,4절)
타인을 용서하는 것은 또한 자신을 용서하는 것이 된다. 그때서야 내면의 상처가 아물고, 과거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박성하 / 로뎀아카데미 원장
시조, 2016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