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甲)질
지난 해 연말은 이른바 “땅콩 회항” 사건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다. 2014년 12월 5일 0시 50분(현지 시각), 미국 뉴욕 JFK공항에서 인천으로 가는 대한항공 KE086 항공기가 이륙을 위해 견인차(Towing Car)에 연결되어 뒤로 이동(Push back)하던 중 갑자기 탑승구로 되돌아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이유는 이 비행기 퍼스트 클래스에 탑승한 대한항공 부사장이 승무원이 견과류를 그릇에 담지 않고 봉지째 내오자 서비스 매뉴얼대로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무장을 비행기에서 내리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로 인해 해당 항공편은 예정보다 46분 늦게 이륙했고 16분 가량 지연되어서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이 사건은 2013년 4월 15일, 인천발 미국 LA행 대한항공 A380기에서 발생한 이른바 “라면 상무” 사건에 이어 소위 “슈퍼 갑질” 논란을 일으켰다. “라면 상무” 사건은 해당 비행기 비즈니스석에 탑승한 포스코에너지의 한 임원이 주문한 라면에 대한 불만으로 승무원을 폭행한 사건이다. 그 임원은 이름과 가족관계, 사진이 인터넷에 공개돼 네티즌의 몰매를 맞았고, 결국 회사를 떠났다고 한다.
갑(甲)질의 의미
갑질이란 단어는 ‘갑(甲)’에 어떤 행동을 뜻하는 접미사인 ‘질’을 붙여 만들어진 신조어이다. 위계가 높은 사람 또는 대상(甲)이 권리관계에서 약자인 을(乙)에게 하는 부당행위를 통칭하는 개념이다. 인터넷에서는 갑의 무한권력을 꼬집는 ‘슈퍼갑’, ‘울트라갑’이라는 말이 떠돌고 있다. 갑처럼 군림하려는 사람을 일러 ‘갑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라고도 한다. 갑질의 횡포를 가리켜 한 광고를 패러디하여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시키는 대로 하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2013년 5월 4일에는 소위 “조폭 우유” 사건이 터졌다. 남양유업의 영업사원이 대리점주에게 제품을 밀어넘기며 온갖 욕설을 퍼부어 댄 녹취록이 발단이었다. 2분45초 분량의 녹취록에는 30대 본사 영업사원이 50대 대리점 주인에게 “죽기 싫으면 받아요. … 물건 못 들어간다는 그 따위 소리 하지 말고 알아서 해.”라고 하며 반말은 물론 욕설까지 퍼부어대는 장면이 그대로 녹음되어 있다. 유통업계의 ‘갑-을’ 관계의 병폐가 여실히 드러난 장면이다. 남양유업은 이튿날 홈페이지에 대표이사 이름으로 사과문을 올리고 “녹취록은 3년 전에 발생한 문제로, 해당 영업사원은 즉각 사표수리를 했다”고 밝혔지만 불매운동이 번지는 등 여론의 공분을 샀다.
그보다 앞서 2013년 4월 24일에는 소위 “빵 회장” 사건이 터졌다. 당일 프라임베이커리 회장은 지인을 만나기 위해 서울롯데호텔 주차장 입구 임시 주차장에 정차해 있었다. 이곳은 공무로 호텔을 방문하는 정부 관계자들만 잠시 주차하는 곳이라 한다. 그 회장은 호텔 측 허락을 받고 정차해 있었지만 시간이 길어지자 현관서비스 지배인이 다가와 차를 이동시켜 줄 것을 요구했다. 거듭되는 요구에 화가 난 회장은 50대 지배인의 뺨을 장지갑으로 후려쳤고, 이 사건으로 결국 종업원 10명 규모의 빵 공장은 문을 닫고 말았다.
역(逆) 갑질
그렇다면 갑질은 반드시 우월적 권력과 지위를 가진 사람들만 하는 것일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정부 기관이나 대기업을 대상으로 민원을 넣고 갑질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해당 기관은 갑이지만,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철저한 을이다. 많은 경우 그들은 먹기 살기 위해 ‘노예 서비스’를 감내한다. 이런 생리를 이용해서 갑질을 해대는 수많은 을들이 있다.
언젠가 인터넷 유튜브를 통해 리카온(아프리카 들개)이 임팔라를 사냥하는 것을 본적이 있다. 리카온들은 보통 10-15마리씩 무리를 지어 사냥한다. 사자나 표범은 대개 먹잇감을 잡으면 숨통을 끊어 놓은 후 먹지만, 리카온은 먹잇감을 잡자마자 십여 마리가 달라 들어 아직 눈을 끔뻑이고 있는 먹잇감이 숨을 거두기도 전에 먹어치운다. 여론화된 갑을 취재하고 보도하는 과정에서, 또 누리꾼들의 신상털기에서 리카온의 모습이 연상되는 것은 지나친 것일까?
‘나-그것’과 ‘나-너’
유대 신학자이자 철학자, 교육학자였던 마르틴 부버(Martin Buber)는 “나와 너(Ich und Du)”라는 책에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상대방을 인격적 주체인 ‘너’로 보지 않고 도구적 혹은 수단적이나 사물적 존재인 ‘그것’으로 보는 ‘나-그것’의 관계로 타락하고 있다고 경고하면서, ‘나-너’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사도 바울은 먼저 ‘을’에게 이렇게 권고한다.
“종들은 두렵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주인에게 복종하십시오. 그리스도께 복종하듯이 참마음으로 순종하기 바랍니다.”(에베소서 6장 5-7절, 쉬운 성경)
그리고 ‘갑’에게도 이렇게 권고한다.
“주인들도 똑같이 종들에게 잘해 주고, 윽박지르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주인이기도 하지만 동일하게 그들의 주인도 되시는 분이 하늘에 계십니다. 우리 주님은 모든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똑같이 대해 주는 분이십니다.”(에베소서 6장 9절, 쉬운 성경)
이것이 바울식 황금률이다. 종이 상전에 대해 품은 것과 동일한 정신을 상전도 종에 대해 품어야 한다. 왜냐하면 상전이나 종이나 그들의 행위를 하나님의 눈이 굽어보기 때문이다. 비록 바울이 노예제도를 다루고 있지만, 이 권고는 현대사회의 고용주와 고용인 관계에도 적용할 수 있다. 우리사회의 노사(勞使), 민관(民官), 노소(老少) 그리고 지역 간 갈등을 해결하는 열쇠는 아전인수(我田引水, 제 논에 물대기)식 사고를 버리고, 역지사지(易地思之, 남과 처지를 바꾸어 생각함)식 사고를 갖는 것이다.
박성하 / 로뎀아카데미 원장
시조, 2015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