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의 역설
지난 8월 23일, 보스턴 글로브(The Boston Globe)의 존 엘런(John L. Allen)은 “한국에서 두 개의 배지 착용으로 보여준 교황의 방식(Two pins in South Korea show a pope doing it his way)”이라는 글에서 “그 ‘배지의 경우’ 스스로를 낮추고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 시대의 높이 솟은 역설을 뒷받침한다”고 지적했다.
엘런은 “교황이 방한 중 부착한 배지는 세월호 참사를 상징하는 노란 리본과 위안부 할머니의 고통을 상징하는 나비 모양의 배지였다”면서, 교황이 부착한 노란 리본은 “대부분 한국인들의 마음 속에 단순한 위로의 표현이 아니라 특별법 제정을 압박하고 정부의 비협조에 대한 분노에 연대하고 있음을 표현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고 분석했다.
노란 리본은 방한 이틀째부터 한국을 떠날 때까지 교황의 제의에 달려 있었고, 나비는 마지막 날에 위안부 생존 할머니들로부터 받아 그 자리에서 가슴에 달고 미사를 집전했다. 교황의 이러한 행보는 미사 때 자신의 주장을 표시하는 것을 사실상 금한 가톨릭의 규정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노란 리본은 한국 정부와, 나비 배지는 일본 정부와 정치적 파장을 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당신은 중립을 지켜야 한다”며 그 리본을 떼라고 했을 때, 교황은 단호히 ”고통 받는 인간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는 없다”고 거절했다고 한다.
낮은 데로 임한 교황
지난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의 4박5일 간의 내한(來韓)에 가톨릭 신자들 뿐 아니라 온 국민이 열광했다. 한 일간지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인기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불안감”이라고 지적했다.
당시 우리 국민들은 불과 4개월 전 일어난 세월호 참사와 무력하기만 한 정부 시스템에 절망하고 있었다. 우리는 해방 후부터 지금까지 친일과 반일, 좌우대립, 남한과 북한, 산업화와 민주화, 보수와 진보, 영남과 호남, 성장과 균형, 노동과 자본, 개발과 보존, 안보와 인권 등으로 끊임없이 분열하고 충돌해 왔다. 사회적, 경제적 양극화도 심화되고 있다. 정치나 종교 어디를 둘러봐도 이러한 갈등과 분열을 수습할 지도자는 보이지 않는다.
바로 이러한 때 프란치스코 교황이 찾아왔다. 그는 한국에 도착해 가장 먼저 세월호 참사 희생자 유가족, 새터민, 장애인, 이주 노동자 등 우리 사회의 약자들과 만나는 것으로 방한 일정을 시작했다. 그는 의전차량(포프모빌)으로 기아자동차 ‘쏘울’을 선택했다. 대전을 갈 때는 헬기가 아닌 KTX를 탔다. 충북 음성 꽃동네에서는 78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50여 분 내내 선 채로 장애 아동들의 공연을 관람했다.
성경의 예언
여러 성경주석가들은 요한계시록 13장 1-10절의 예언을 교황권에 적용하고 있다. 1798년 2월 15일, 프랑스 혁명정부의 지시에 따라 알렉산더 베르띠에(Alexander Berthier) 장군은 로마로 진격하여 교황 비오 6세를 생포했다. 당시 80세인 교황은 시스티나 성당에서 재위 23주년 기념식을 거행하고 있었다. 체포된 교황은 이탈리아와 남프랑스의 여러 곳으로 거칠게 끌려 다니다가 이듬해 8월 29일 발렌스(Valence) 감옥에서 옥사했다. 1870년 신생 이탈리아 통일 정부가 교황 국가를 흡수함으로 교황권은 “죽게 된 것 같”(요한계시록 13장 3절)이 되었다.
그러나 1929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와 교황 비오 11세로부터 전권을 이양받은 베니토 무솔리니와 피에트로 가스파리 추기경이 라테란 조약(Lateran Treaty)을 체결했다. 이로써 0.44㎢(우리나라 경복궁의 1.3배 면적)의 바티칸 시를 교황령으로 하는 교황 국가가 탄생하게 되었고, 교황은 다시 사제와 군주를 겸한 권력자가 될 수 있었다.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요한계시록 13장 3절)은 것이다.
1962년 교황 요한 23세(1958-1963)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가톨릭의 영향력을 크게 회복시켰다. 1980년 대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1978-2005)가 동유럽에 자유화 물결을 일으키며 공산주의를 몰락시켰으며, 1984년 1월 10일 미국과 공식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곧이어 3월에 레이건 대통령이 미 의회의 승인을 받아 윌리엄 A. 윌슨을 주(駐) 바티칸 대사로 임명하자 여러 나라들이 뒤따라 교황청과 외교관계를 수립함으로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계 13:3)를 것이라는 예언이 성취되고 있다.
배지의 파격
가난하고, 박해받고, 소외되고, 상처받은 영혼들에게 다가가 낮은 자세로 배려하고 공감하며 위로와 희망을 선사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행위는 칭찬할만하다. 그러나 우리는 교황이 착용한 두 개의 배지의 놀라운 파격에 주목해야 한다.
요한계시록 13장은 땅에서 올라온 짐승(11절)이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계 13:14)고,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계 13:15)고 예언하고 있다.
이것은 교회가 자신들의 신조를 강요하기 위해 정부와 연합할 것이며, 그 결과 종교적 자유가 박탈되고 의견을 달리하는 소수가 핍박을 받게 될 것을 의미한다.
로마 가톨릭 교리서 816조는 “가톨릭은 그리스도의 유일한 교회로서…이 교회는 베드로의 후계자와 그와 일치하는 주교들이 다스리고 있는 가톨릭교회 안에 존재한다”고 하였다. 즉, 가톨릭만이 그리스도의 유일한 교회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톨릭 신앙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이단’이거나 ‘이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가톨릭의 역설이다.
존 엘런은 배지 착용과 관련하여 “아무리 그 대의가 고귀하다 하더라도 이것은 위험한 선례를 남긴다”는 전문가의 말을 인용하고 “하지만 이것 역시 프란치스코는 구애받지 않았다. ‘배지 사건’은 그 자체로 소소한 것이지만 프란치스코 시대의 뛰어난 역설을 강조한다”고 평가했다.
박성하 / 로뎀아카데미 원장
시조, 2014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