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의 미학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현대 사회는 느림이라는 처방이 필요한 환자다.
아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 몇 가정과 함께 단양에 있는 고수동굴에 갔다. 아들 녀석은 난생 처음 들어가 보는 동굴 위세에 눌렸는지 다소 긴장된 표정이더니 이내 또래들과 장난을 치며 앞서 갔다. 사자바위를 비롯하여, 웅장한 폭포를 이루는 종유석, 선녀탕, 땅에서 돌출되어 올라온 석순, 석순과 종유석이 만나 기둥을 이룬 석주 등을 감상하고 밖에 나오니 아들이 기념품 가게로 나를 끌고가더니 요지경(瑤池鏡)을 사달라고 졸랐다. 사진기처럼 생긴 요지경에 눈을 대고 돌려보니 방금 보고 나온 동굴 속 사진이었다.
“야, 이거 방금 보고 나온 동굴 사진들인데 뭐하러 사니?”
내가 핀잔을 주자 아들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무서워서 빨리 나오느라 계단 밖에 못봤단 말에요.”
프랑스 철학자 피에르 쌍소(Pierre Sansot)는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라고 묻는다. 정상 정복이 목적인 등산가는 풀잎 사이에 숨어 핀 꽃을 볼 여유가 없다. 그러나 느린 걸음으로 산을 오르는 사람은 뺨을 간질이는 바람결과 새들의 노랫소리를 즐길 수 있다.
빨리빨리 문화
지난 1992년, 필자가 스핑크스를 보기 위해 이집트의 기자(Giza)에 내렸을 때, 몰려든 상인들은 코리아라는 나라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88 올림픽!” 하고 외치자 그제서야 “오, 서울!”하고 응답했다.
10년 후 성지순례단을 이끌고 다시 기자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자, 몰려든 상인들이 일본 사람이냐고 물었다. 코리안이라고 대답하자 대뜸 “오! 빨리빨리!”하고 외쳤다. 그도 그럴 것이 관광 코스마다 한국인 관광객 인솔자들이 손을 휘저으며 “빨리빨리”를 외치고 있었다.
지난 2월, 세계 최대의 HDD(하드디스크드라이브) 제조사 중 한 곳인 씨게이트(Seagate)가 한국에 연면적 2만 6,000제곱 미터(약 7,800평)의 7층짜리 R&D(연구개발) 센터를 개관했다. 스티브 루조(Steve Luczo) 회장은 불과 9개월 만에 이런 규모의 건물과 각종 시설을 완공한 한국 특유의 빠른 속도감에 감탄하면서 “확실히 이건 한국만이 가능한 일입니다.”라고 말했다.
빨리빨리 부작용
한국어 중 “김치(Kimchi)”, “온돌(Ondol)” 그리고 ‘빨리빨리(ppalli ppalli)’가 영국 옥스퍼드 사전에 등재되었다고 한다. “빨리빨리”는 한국을 대표하는 단어이다. 이 문화는 21세기로 접어들면서 국가경쟁력이라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빨리빨리” 문화의 조급증은 각종 부실공사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급행료 관행에 따른 각종 비리와 부패의 고리가 되기도 하였다. 또 우리나라를 교통사고 다발 국가로 만들기도 하고, 패스트푸드 범람으로 국민건강을 위협하고 있다. 고도화된 산업사회는 우리에게 편리함과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 준 대신, 정신적 여유와 평안을 앗아갔다. 사람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부를 축적하는 데 소비한다. 이에 비해 정신 건강은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고, 이로 인해 스트레스와 심한 경우에는 정신적 공황을 겪기도 한다. 한 조사에 따르면 직장인 87.8%가 직무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고, 이로 인해 뇌와 심혈관 건강에 위협을 받고 있다고 한다.
웰빙족, 슬로비족, 캔들족
쌍소는 “현대 사회는 느림이라는 처방이 필요한 환자다”라고 정의했다. 지난 2000년 경부터 “복지·행복·안녕” 등을 의미하는 “웰빙(Well-Being)”이 유행했다. 웰빙은 현대사회의 병폐를 인식하고, 육체적‧정신적 건강의 조화를 통해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영위하려는 새로운 삶의 문화 또는 그러한 양식을 말한다. 이러한 “웰빙족”들은 고기 대신 유기농산물을 즐기고, 단전호흡‧요가‧등산 등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는 운동을 하며, 외식보다는 가정에서 만든 슬로우푸드를 즐겨 먹고, 여행‧독서‧문화활동 등 취미생활을 즐기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슬로비(Slobbie)족은 “천천히 그러나 더 훌륭하게 일하는 사람(Slow But Better Working People)”의 약칭이다. 이들은 삶의 속도를 늦추고 보다 천천히 살기를 원하며 물질과 출세보다는 마음의 행복과 가족을 중시한다.
캔들(Candle)족은 일주일에 한 시간만이라도 전등대신 촛불을 켜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TV와 컴퓨터, 스마트폰에 뺏겼던 시간을 되찾고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자는 것이다.
9가지 느림 실천법
피에르 쌍소는 좀더 느리게 적극적으로 살기 위해 다음 9가지 실천법을 제안한다.
첫째, 한가로이 거닐기. 주변을 즐기며 천천히 걸어보라.
둘째, 듣기. 말하기보다 남의 말을 들어보라.
셋째, 권태. 바쁜 일을 제쳐놓고 느긋함을 즐겨보라.
넷째, 꿈꾸기. 즐거운 몽상에 빠져보라.
다섯째, 기다리기. 열린 자세로 결과를 기다리라.
여섯째, 고향. 나만의 마음의 고향을 가지라.
일곱째, 글쓰기. 마음의 진실을 형상화하라.
여덟째, 포도주. 느긋하게 차 마실 시간을 가지라.
아홉째, 모데라토 칸타빌레. 극단보다는 절제하라.
예수께서도 지친 제자들에게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어라”(막 6:31)고 하셨다. 파스칼(Pascal)은 “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 가지, 고요한 방에 들어앉아 휴식할 줄 모른다는 데서 비롯된다.”고 하였다. 휴일마다 대부분의 시간을 고속도로에서 보내며 꼭 어디를 갔다와야 하는가? 하늘이 파랗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 온 세상을 다 돌아다닐 필요는 없는 것이다. 올 휴가는 가족과 집 근처를 거닐며 느림의 미학을 즐겨보는 건 어떨까.
박성하 /로뎀아카데미 원장
시조, 2013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