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탄생과 크리스마스
12월이 되면, 거리에는 캐럴이 울려 퍼지고 가지만 앙상한 도심의 나목(裸木)들은 오색 찬란한 빛으로 갈아입는다. 교회 뿐 아니라 백화점이나 대형 쇼핑센터 등에서도 거대한 성탄 트리를 설치하여 성탄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그러나 트리는 손님을 끌기 위한 상업수단에 불과하고, 예수님은 산타 할아버지에 치여 뒷전이다. 오늘날 크리스마스는 연말의 들뜬 분위기에 편승해 탈선과 범죄를 유발하는 날이 되기도 한다.
크리스마스의 기원
12월 25일은 예수가 태어난 날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예수 탄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 날은 태양숭배와 관련된 이교(異敎)의 축제일이었다. 이 절기는 라틴어로 ‘디에스 나탈리스 솔리스 인비크티’(dies natalis solis invicti)라고 했는데, ‘정복할 수 없는 태양의 생일’이라는 뜻이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예수의 탄생일을 12월 25일로 정한 것은 당시 ‘정복할 수 없는 태양’의 축제가 매우 화려하게 축하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톨릭 측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확인하고 있다.
“평화가 이룩된 후 로마 교회는 이교도들이 믿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용이하도록 하기 위해, 그들이 이교의 축제에서 돌아서도록, 흑암의 정복자인 ‘무적(無敵)의 태양’ 미드라(Mithras)를 영광스럽게 하는 같은 날인 12월 25일을 그리스도의 임시적인 생일로 제정하는 것이 편리한 것을 발견했다.”(Mario Righetti, Storia Liturgica, II. p.67. Milano: Editrice Ancora, 1955)
크리스마스(christmas)라는 용어도 그리스도(Christ)의 미사(Mass)라는 뜻이며, 미사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제사를 의미한다.
실제 예수의 탄생일
성경에는 예수의 탄생일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여러 기록들을 종합하면 대략 언제쯤 출생했는지 계산이 가능하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 수태를 고지할 때, 엘리사벳은 요한을 임신하지 6개월째였다(눅 1:36). 엘리사벳은 그의 남편 사가랴가 성소에서 제사장 직무를 수행할 때(눅 1:8, 9) 요한을 잉태하였다. 사가랴는 아비야 조(눅 1:5)에 속하기 때문에 그가 직무를 수행한 때는 태양력으로 7-8월 사이가 된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한 때는 다음 해 1-2월 사이가 되고, 출생일은 9-10월이 된다. 이것은 예수가 탄생할 때, “그 지역에서 목자들이 들에 거하며 밤에 자기 양떼를 지”(눅 2:8, 킹제임스 흠정역)켰다는 기록과도 맞아 떨어진다.
팔레스타인의 기후는 건기와 우기로 나누어진다. 건기는 태양력으로 4월에서 9월까지이고, 우기는 10월에서 이듬 해 3월까지이다. 우기가 시작되는 9월에서 10월 사이에 내리는 비를 ‘이른 비’라고 하는데, 이 비로 땅이 부드러워지고 파종이 가능하게 된다. 12월 하순부터 2월까지 내리는 비를 ‘겨울 비’라고 하는데 기온이 5-12℃ 가량까지 떨어지고 밤에는 추워서 야외에서 지내기가 어렵다. 따라서 12월 25일은 목자들이 들에 거하며 양떼를 지켰다는 성경의 기록과 맞지 않는다.
마음의 구유
예수 탄생의 의미는 그 날자가 아니라 목적에 있다. 예수께서는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내 생명마저 주려고 왔다”(마 20:28)고 하셨다. 또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고 하셨다.
비록 크리스마스가 예수 탄생일은 아니지만, 한 해를 마감하면서 예수 탄생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고인이 되신 정채봉 님의 “내 가슴 속 램프”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가슴앓이 병을 앓고 있는 한 목동이 있었다. 그 병은 자기보다 잘 사는 이웃에 대한 질시 때문에 생긴 병이었다. 의원들을 찾아다니며 온갖 약을 다 써봤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어느 날, 목동은 우연히 한 나그네를 만났다. 물먹을 장소를 찾는 그에게 양젖을 한 사발 적선하자 청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거룩한 아기를 맞으십시오.”
“언제, 어디서요?”
“하늘에 영광이 가득할 때, 평화의 구유에서.”
그리고 나그네는 사라졌다. 목동은 들에서 양을 지키며 거룩한 아기를 기다렸다. 별이 유난히 반짝이던 어느 날 밤, 별 하나가 남쪽으로 떨어졌다. 목동은 그 곳을 향해 물을 건너고 재를 넘으며 달렸다. 갑자기 뭔가가 발에 채였다. 기갈이 들어 쓰러진 나그네였다.
“나를 좀 도와 주시오.”
“나는 지금 바쁩니다. 거룩한 아기가 탄생한 곳에 속히 가야합니다.”
“그냥 가면 나는 죽습니다. 제발 나를 도와주시오.”
목동은 생각했다. ‘거룩한 아이를 만나면 나도 부자가 되고 출세도 할텐데…’ 하지만 그냥 간다면 나그네는 죽을 것이었다. 망설이던 목동은 가던 길을 멈추고 자기 외투를 벗어 나그네를 덮어주고 옆구리에 찬 통을 열어 우유를 먹였다. 갑자기 나그네가 천사로 변하더니 말했다.
“사랑하는 목동아, 일어나 거룩한 아기를 맞으라.”
“거룩한 아기가 어디 있습니까?”
“지금 네 마음에 태어나셨다.”
순간 목동의 가슴앓이는 씻은 듯이 나았다.
이야기 끝에 이런 글이 있다.
“천리 먼 곳에 백번 천번 거룩한 아이가 태어나면 무엇하느냐. 한번이라도 네 깨끗한 마음을 구유로 청하여 태어난 거룩한 아기가 소중한 것이다.”
올해도 성탄절이 찾아왔다. 그러나 성탄절을 천만번 맞이한다 해도, 그분이 내 마음 안에 태어나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사람의 인격을 구성하는 요소에는 사랑과 자애(自愛) 두 가지가 있다. 사랑은 밖에서 그 사랑을 추구하고, 자애는 자신 안에서 사랑을 추구한다. 엘렌 G. 화잇은 “자기희생의 법칙은 자기 보존의 법칙이다. 그러나 자아봉사의 법칙은 자멸의 법칙이다.”고 하였다.
예수님의 오심은 한 알의 밀알로 땅에 떨어져 죽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희생으로 많은 사람이 생명을 얻게 되었다. 예수 믿어 복 많이 받고 남보다 잘되려는 심보는 예수께서 오신 목적과 거리가 멀다.
올 연말은 경기하락으로 쓸쓸한 성탄절이 될 전망이다. 그러나 피차 건네는 따뜻한 격려의 말 한 마디, 조그마한 카드 한 장,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작은 정성들이 있다면, 올 겨울도 춥지만은 않을 것이다. 진정한 부자란 많이 가진 자가 아니라 많이 베푸는 자라는 말이 있다. 모두들 경제사정이 어렵다는데 쉽게 부자되는 방법도 있나 보다.
박성하 / 로뎀아카데미 원장
시조, 2008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