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고기 파동과 교회
쇠고기 촛불집회는 지난 5월 2일 처음 시작됐다. 4월까지만 해도 쇠고기 논란은 ‘이명박 대통령의 방미 선물로 졸속 협상을 했다’라는 정치 공방 정도였다. 촛불집회를 점화시킨 것은 4월 29일 방영된 MBC 시사프로그램 PD수첩의 ‘미국산 쇠고기, 광우병에서 안전한가’였다. 이 방송을 계기로 5월 2일 미국산 쇠고기 반대 온라인 모임 연합으로 청계광장에서 첫 촛불집회가 열렸고, 10대 청소년들을 중심으로 1만 명 이상이 참여했다. 이어 5월 6일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을 반대하는 국민대책회의’가 결성됐고, 촛불집회를 본격적으로 주도하기 시작했다.
종교계의 가세
폭력시위와 강경진압으로 위기에 봉착했던 촛불집회는 6월 30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시국 미사를 시작으로, 7월 3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의 시국 기도회, 4일 실천불교전국승가회의 시국 법회 등을 계기로 평화기조로 돌아섰다. 그리고 7일부터 종교단체들이 잠정적으로 시국집회를 주최하지 않기로 하면서 두 달 이상 진행되어 온 촛불집회는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종교계 내에서는 현실 참여에 대한 해묵은 논란이 재현됐다. 종교단체들이 시국집회를 중단한 이유 중의 하나도 정치 참여에 대한 종교계 내부의 비판 때문이었다. 천주교, 기독교, 불교 할 것 없이 시국 집회를 주최한 단체에 보수 성향을 가진 신도들의 항의 전화가 잇따르고, 집회 개최를 자제해달라는 요청도 이어졌다고 한다. 종교계 뿐 아니라 사회 지도층, 전문가 집단 내부에서 분열상이 나타나고 있다.
종교의 현실참여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종교계는 현실문제에 깊숙이 관여해 왔다. 1860년 동학(천도교)의 등장 이후 민족종교들이 동학 민중항쟁 등을 통해 봉건시대 타파에 나섰다. 일제 강점기 때도 천도교·대종교·보천교·청림교 등 민족종교들이 항일투쟁에 적극 참여했다. 3․1 운동의 민족대표 33인도 모두 종교계 대표였다(개신교 16명, 천도교 15명, 불교 2명).
그리고 1970년대 이후 독재정권의 인권 탄압에 맞서고 민주화를 이루는 데에 개신교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천주교는 조선말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사회변혁을 추구하다 박해를 당한 이후 일제시대 동안에는 현실참여에서 한발자국 물러나 있었으나, 1974년 지학순 주교가 반정부 시위를 주모한 혐의를 받고 있던 김지하 시인에게 자금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간 것이 계기가 되어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결성되면서 현실문제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번 쇠고기 촛불집회도 천주교 측에서 가장 먼저 참여했다.
현실 참여와 예수
예수께서 고향 나사렛을 방문하여 안식일에 회당 예배에 참석했을 때, 회중들이 이사야서를 건네주며 설교를 요청하자 그는 이사야 61장 1, 2절을 찾아 읽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 19)
그리고는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 4:21)고 선언하였다. 이것은 예수께서 자신의 사명을 고통받은 백성들의 현실과 연결시킨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 전체 구절의 절정인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이라는 구절을 읽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구원은 자신들을 위한 것이며 징벌은 이방인들을 위한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들이 기대한 메시야는 막강한 군대를 진두지휘하며 대적을 무찌르고 온 세상을 이스라엘의 세력 아래 굴복시킬 사람이었다. 이 근본적인 오해가 고난받는 메시야에 대한 성경의 예언들을 고의적으로 간과하게 했고, 재림의 영광을 가리키는 예언들을 현실적 메시야에 잘못 적용함으로 결국 예수를 거절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사회․정치적 변혁의 의미로 오해될 수 있는 구절을 생략하고 읽지 않으신 것이다.
정진홍 서울대 명예교수(종교학과)가 지적한대로 “신념의 맹목성을 추구하는 종교의 속성상 종교계의 현실참여는 좋은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중세 가톨릭 교회가 그러했고, 16세기 제네바에서의 칼빈의 신정정치가 그러했다. 지난 2004년 한국기독당을 창당한 인사들의 변은 “교회가 현실 정치를 외면하면 버림받을 수 밖에 없”으며 “우리 사회의 부정과 부패를 보고 더 이상 교회가 침묵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이 과연 예수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것인가?
예수께서는 종교와 사회의 타락과 부패를 신랄하게 책망을 하시고 개혁을 촉구하셨지만, 단 한 번도 세속적 정권을 도모하거나 부패한 정부나 체제에 대항하여 전복을 기도하신 적이 없다. 정치와 종교 분리 원칙은 바리새인들이 정복자인 로마에 세금을 납부하는 것이 옳은지 물었을 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 22:21)는 답변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예수를 체포하러 온 무리들에 대항하여 베드로가 검을 뽑았을 때도 예수께서는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마 26:52)고 하셨다. 빌라도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을 때에도,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고 말씀하셨다.
기독교의 “현실참여”는 언제나 ‘예수 정신’에 따른 인류애적인 참여가 되어야지 반체제적이고, 반정권적이어서는 안 된다. 사도 바울은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롬 13:2)고 권고하였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현실정치에 반영하려고 시도한 결과가 무엇인가? 그것은 결국 종교․민족 간 충돌을 불러왔고, 증오와 테러를 불러들였다. 그렇다고 종교가 악과 모순에 대해 눈을 감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종교인이 정치를 하거나 정치적 발언을 할 수도 있다. 다만 종교계의 정치참여는 보편가치에 의거한 간접참여에 한정해야 한다.
종교계는 자기 자리에 서서 대통령과 국회, 행정부, 사법부 등이 합법적 과정을 통해 하루빨리 문제를 수습하도록 촉구하는 선에서 그쳐야 한다. 국민의 건강 안전과 검역 주권 회복을 요구하는 차원을 넘어 정권 퇴진을 거론하는 것은 종교계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종교는 언제나 갈등 치유의 마지막 보루가 되어야지, 갈등의 근원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박성하 / 로뎀아카데미 원장
시조, 2008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