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는 정말 오시는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3)
예수께서는 세상에서의 그의 사역을 마치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을 아셨다. 베드로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요 13:36) 하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남기셨다. 이른바 재림의 약속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기독교 최대의 소망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눅 19:11)했다. 이러한 생각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 감람산에 모였을 때에 제자들은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행 1:6)고 물었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천사들은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 1:11)고 보증하였다.
사도행전 교회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한 것도, 오순절 이후 복음전도에 힘쓴 것도 모두 재림에 대한 믿음과 고대 때문이었다.
사도시대에도 임박한 재림신앙은 계속되었다.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에 편지하면서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롬 13:11)고 하였다. 그리고 고린도전서도 “마라나타” 곧 “우리 주가 오신다.” 혹은 “우리 주님, 오시옵소서.”라는 말로 맺는다(고전 16:22). 이 말은 요한서신 이후 기록된 가장 오래된 기독교 서적인 “디다케”(12사도의 교훈)에도 언급됐고, 초기 기독교인들의 인사말로 사용됐다. 이것은 초대교회가 임박한 재림신앙을 갖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사도 베드로 역시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벧후 3:10)라고 경고하고,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11절)라고 묻고 있다. 곧 이어서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벧후 3:11, 12)고 권고한다. 야고보 또한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약 5:8)고 말하고,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9절)고 하였다.
또한 예수님은 친히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계 22:20)고 말씀하셨고, 요한은 이 말을 받아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말로 요한계시록을 마친다. 이렇게 재림에 관한 약속은 신약에만 331번이나 언급되어 있다.
초기 기독교는 로마의 박해를 받으면서 재림의 소망이 더욱 고조되었다. 그러나 재림이 지연되면서 재림의 소망으로 충만해 있던 교회는 조금씩 지쳐갔다. 그리스 교부(敎父) 오리게네스(Ōrigenēs, 185?∼254?)와 라틴 교부 아우구스티누스 (Aurelius Augustinus, 354∼430) 등은 재림을 정신적인 뜻으로 이해하려 했다.
16세기,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임박한 재림신앙이 다시 고조되기 시작했지만, 역시 재림이 이루어지지 않자 18세기 초에 이르러 대부분의 개신교 신학자들은 재림을 영적의미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20세기에 이르자 독일의 의사이자 신학자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1965)는 “철저적 종말론”(Consistent Eschatology)을 제창했다. 그는 <역사적 예수 탐구>(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 1906)에서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도래 시기를 오해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12제자를 파송하면서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마 10:23)고 하였는데, 제자들이 전도사역을 마치고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자, 자기 수난과 죽음의 때로 시기를 연장하였지만 결국 실패로 끝났다는 것이다.
이러한 종말론은 20세기 신학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전통적 재림신앙을 파괴하였다.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은 예수의 재림은 인정하면서도, 초대교회가 예수님의 “가까이 왔다”는 예언을 오해했다고 주장했다. 베르너 게오르그 큄멜(Werner Georg Kümmel)도 예수께서 재림의 임박성을 자기 세대 안에서 이루어질 것으로 착각하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종말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 중 극히 일부분만을 발췌하여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되고 있는 현실을 이성적으로 설명해 보려는 인본주의적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수께서는 “깨어 있으라”, “내가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셨지만, 동시에 재림이 상당 기간 지연될 것을 여러번 암시하셨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도 신랑이 “더디”(마 25:5)오는 것으로 묘사하였고, 달란트의 비유에서도 주인이 “오랜 후에”(마 25:19) 돌아오는 것으로 말씀하셨다. 므나의 비유도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눅 19:11)하는 제자들을 위해 교훈하시면서, 귀인이 왕위를 받기 위해 “먼 나라로”(눅 19:12) 간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마태복음 24장 14절에서도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하셨다.
현실적으로 재림은 거의 2천년 가까이 지연상태에 있다. 그렇다면 재림의 임박성에 대한 강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재림의 임박성의 실재 의미는 시간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재림의 확실성과 현재에 대한 그것의 영향력에 있는 것이다. 재림의 지연에도 불구하고 각 시대 그리스도인들은 속히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으로 살아야 했다. 그것은 예수님의 재림이 확실하기 때문이며, 그 확실성이 각 시대 성도들이 항상 깨어 준비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악한 종의 비유”에서 임박성을 상실한 종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무들을 때리며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24:48-51)
임박한 재림신앙은 단지 시간이 임박하기 때문이 아니라 다가올 사건에 대한 확신 때문에 갖는 현재적 태도를 의미한다. 우리가 사는 시대에 여러 재림의 징조들이 성취되고 있고 그것들이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막 13:29) 것을 말해주고 있지만, 그러나 진정한 재림신앙은 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건의 확실성 때문에 현재 깨어 있는 삶을 사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깨어 있으라”(막 13:37)고 말씀하셨고, 이어서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고 부언하셨다. 즉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초대교회로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주신 권면인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대인들이 유월절마다 부르는 노래가 있다. 그것은 “아니마민”이다. 그 뜻은 “나는 믿는다”이다. 그 노래는 누군가 아우슈비츠 수용소 지하벽에 써놓은 글에 기초하여 만들어졌다.
“우리는 메시야가 오실 것을 믿는다. 단지 그분의 도착이 좀 늦어지고 있을 뿐이다.”
매일 수많은 유대인들이 가스실에서 죽어가는 상황에서 이런 글을 썼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런데 그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빅토르 프랭클(Victor Frankle)이라는 의사가 노래 가사를 다음과 같이 고쳐 불렀다.
“우리의 구세주는 약속하신대로 오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사람들은 그가 늦게 오신다고 불평한다. 그러나 아니다. 사실은 우리가 너무 조급해 할 따름이다.”
히브리 기자는 확신을 갖고 말한다.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히 10:37)
박성하 / 로뎀아카데미 원장
* 이 글은 2018년 <예수바리기>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