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나무과 선악나무는 실제인가
생명나무와 선악나무는 성경에서 에덴 동산의 창설을 언급할 때 처음 나타난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창 2:8, 9)
이 두 나무는 어떤 나무인가? 그것은 실제인가 상징인가? 두 나무가 왜 필요한가? 이러한 의문에 대해 심지어 성경의 영감성을 믿는 사람들조차도 여러 견해로 나누어져 있다. 과연 이 두 나무는 어떤 나무인가?
두 나무의 이름들
“생명나무”는 문자적으로 “그 생명”(the life)의 나무이다. 여기 정관사는 이 나무가 “그” 생명 자체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나타낸다. 다시 말해 사람의 생명은 그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 얻어지거나 유지될 것임을 나타낸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선과 악의 그 지식의 나무”이다. “지식” 앞에 붙은 정관사 “그”는 선악과를 먹음으로 모든 지식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선”과 대조된 “악”에 대한 지식만을 제공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실제인가 상징인가
성경의 영감을 믿는 사람들 중에서도 어떤 사람들(혹은 교파)은 생명나무와 선악나무를 실제로 보지만, 어떤 사람들은 죄를 설명하기 위한 상징으로 본다. 다른 사람들은 생명나무는 하나님, 선악나무는 사탄을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두 나무가 언급된 전후문맥이나 다른 구절들과 비교해 볼 때, 두 나무는 실제 존재했던 나무들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 이유는 첫째, 두 나무의 실재 여부는 창조기록 및 인간의 범죄 기록에 대한 실재 여부와 관련되어 있다. 만일 두 나무가 상징이라면 창조도, 인간의 범죄도 상징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러나 창조와 인간의 범죄가 실재라면 두 나무도 실제로 존재해야 한다.
둘째, 두 나무에 대한 묘사가 두 나무의 실재성을 증거한다. 두 경우 모두 “나무”라는 말이 “생명”과 “지식”이라는 추상적인 단어와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두 나무를 상징으로 해석할 어떤 이유도 제공하지 않는다. 오히려 두 나무가 영적 의미를 가진 실재였음을 증거한다.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포도주를 주면서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고 하셨다. 예수의 피는 “속죄”를 상징한다. 이 속죄를 위해 예수께서는 실제로 피를 흘리셨다. 마찬가지로 두 나무도 중요한 목적을 위해 실제 존재했던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셋째, 생명나무와 관련된 창세기의 기록들이 이 나무가 실재였음을 증거한다. 인간이 범죄한 후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창 3:22)고 염려하셨다. 또한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창 3:24)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간이 생명나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제재하고 있는 것을 나타낸다. 만일 생명나무가 상징이거나 하나님을 나타낸다면 굳이 이렇게 묘사할 까닭이 없고, 전후 문맥이 이상해진다.
넷째, 성경 다른 곳에서 여자의 품행에 대해 교훈하면서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사실을 인용하고 있다.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딤전 2:14)
이러한 여러 정황들을 살펴볼 때, 두 나무가 실재했다는 사실을 의심할 이유가 없다.
두 나무를 만든 이유
태양계 안에서 오직 태양만이 스스로 빛을 발하듯이, 오직 하나님만이 스스로 존재하신다. 성경은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딤전 6:16)다고 말한다. 따라서 모든 피조물들은 어딘가로부터 생명의 에너지를 공급받아야 살아갈 수 있다.
시편 기자는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시 36:9)다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행 17:25)이며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행 17:28)다고 하였다.
사람은 본래 불멸의 존재로 창조되지 않았다. 사람이 영생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끊임없이 생명을 받아야 한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생명나무를 창조하셨다. 사람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 노화를 방지하는 어떤 효소를 섭취할 수 있었다. 심지어 범죄한 후라도 생명나무 열매를 먹으면 죽지 않을 수 있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창 3:22) 염려하여 에덴 동산에서 쫓아내셨다.
그러면 왜 선악나무가 필요했는가? 사람의 영생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조건으로 주어졌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사람은 생명나무에 접근할 수 있었으며, 생명나무 열매를 먹음으로 영생할 수 있었다. 왜 영생에 선악나무라는 조건이 필요했는가? 첫째, 선악나무는 사람들이 자존할 수 없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끊임없이 생명을 공급받아야 하는 피조물임을 깨닫게 한다. 둘째,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피조된 존재임을 깨닫게 될 때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만일 사람이 조건없이 생명과를 먹고 영생할 수 있다면 곧 하나님을 잊게 될 것이고 그 결과 세상은 지옥으로 변하고 말 것이다.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그 결과는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죄악의 참상들이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사람에게 생명나무에의 접근을 금하신 것은 하나님 없이 영생하는 것이 얼마나 큰 저주인지 아셨기 때문이다. 셋째, 선악나무는 사람이 기계처럼 프로그램화 된 존재가 아니라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임을 나타낸다. 왜 자유의지가 필요했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의 대상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사랑은 자발성을 요구한다. 강요되거나 프로그램화 된 사랑은 지적 존재를 만족시키거나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자발적인 순종과 사랑을 나누기를 원하셨다.
금단의 선악나무는 사람에게 최초로 주신 하나님의 율법이다. 하나님은 율법을 주신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인하여 삶을 얻을 내 율례를 주며 내 규례를 알게 하였고 또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 하여 내가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었노라”(겔 20:11)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은 사람으로 삶을 얻게 하기 위해 주어졌다. 십자가를 통한 구속의 목적은 죄로부터 사면을 받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순종을 통해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권고한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계 2:7)
박성하 / 로뎀아카데미 원장
2007.2.12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