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10달과 미래 전망
얼마 전 주말 오후, 가을 날씨가 너무 화창해서 방안에만 있기가 아까웠다. “애기봉이나 올라가 볼까?” 하니 활동적인 아내가 반색을 하고 따라 나섰다. 애기봉은 별내동 집 근처에 있는 불암산 자락의 해발 204미터 높이의 작은 봉우리인데, 본래 무명봉이었지만 별내신도시가 생기면서 사람들이 많이 찾고 있다고 한다. 이름의 연원(淵源)은 알 수 없으나 우스개 소리로 ‘애기도 오를 수 있는 봉우리’라는 뜻이라고도 하는데(실제 어린이들도 많이 오른다), 필자의 짐작으로는 작은 봉우리라는 뜻이 아닌가 싶다,
집을 나서 식송천 길을 따라 걷다 식송마을을 벗어난 후 갑갑한 마스크를 벗었다. 그런데 등산로 입구에 도착하니 “코로나19 확산방지를 위해 등산로 이용시 마스크 착용바랍니다”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산에서까지 마스크를 써야 하나’ 하는 생각에 그냥 등산로에 들어서니 저만치서 마스크를 쓰고 내려오는 사람이 보였다. 혹 누(累)가 될까 싶어 얼른 마스크를 꺼내 썼다.
이제 외출 시 마스크는 필수품이 되었다. 깜박 잊기를 잘하는 아내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마스크를 가지러 집으로 뛰어가는 일이 잦다. 가게나 마트는 물론 주변 산책로를 걸을 때도 마스크를 써야 한다. 길을 걷다 스쳐지나가는 사람의 숨결이 느껴지면 흠칫 숨을 참곤 한다.
지난 2019년 12월 중국 우한시에서 처음 확인된 코로나19는 불과 10개월 만에 전 세계 214개국에서 3400만 명 이상이 감염됐고, 100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우리나라도 1월 20일 중국 우한시에서 입국한 중국인 여성으로 시작해서 10월 초 현재, 2만4천여 명이 감염됐고, 4백여 명이 사망했다.
코로나19 사태 언제 끝날까
코로나 바이러스 백신이나 치료제가 없는 상황에서 가장 효율적인 감염 예방 수칙 중 하나가 ‘사회적 거리두기’이다. 그런데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물리적 거리두기(physical distancing)’라는 표현을 권장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수칙은 시장보기나 직장생활 등 ‘사회활동’을 삼가는 것이 아니라, 감염을 예방하기 위해 ‘밀접대면’을 삼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사회적 거리두기로 우리의 일상은 크게 변화되었다. 손을 잘 씻게 된 것은 물론 악수 등 신체접촉이 거의 사라졌다. 손님들로 북적이던 상가들이 텅텅 비고, 식당도 가급적 안 가게 됐다. 직장인들은 재택근무가 권장되고 출장도 가급적 삼가게 되었다. 보육시설이 문을 닫고, 학교도 비대면 수업을 하고 있다. 각종 공연들이 취소되고, 여행도 중단되었다. 결혼식마저도 연기하거나 비대면으로 치뤄지고, 심지어 장례도 직계 가족과 친한 분들만 모여 조촐하게 치러지고 있다. 이런 상태가 10개월 이상 지속되다 보니 코로나19로 인한 우울감을 나타내는 일명 ‘코로나 블루(blue)’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도대체 코로나19가 언제 끝날까. 지난 8월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인 빌 게이츠는 수백만 명이 더 사망하고 내년 말에야 비로소 종식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테워드로스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은 “그 영향은 앞으로 수십년 간 겪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우리나라 정은경 질병관리청장도 중앙방역대책본부장 시절 “코로나19가 온도 변화와 관계없이 백신이나 치료제가 개발되기 전까지는 장기간 유행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국립중앙의료원 신종감염병 중앙임상위원회 오명돈 위원장은 “(사회적 거리두기와 같은) 봉쇄 조치를 통해 유행을 억제하고 의료시스템의 부하를 감소시킬 수는 있지만 장기적 해결책은 아니다”며 “백신이 나와도 이 감염병 대유행을 끝낼 수 없다”고 강조했다.
팬데믹은 인구 60%가 면역이 생기든지, 아니면 아주 효과적인 백신이 나와야 종료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대부분 감염병은 백신을 맞으면 90% 이상 예방 효과를 내지만, 코로나19 바이러스와 같은 호흡기 전파 바이러스는 50% 정도 밖에 예방 효과가 없다고 한다. 백신을 개발해도 100% 확산을 예방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오 위원장은 “우리는 현재 코로나바이러스와 함께 살아가는 소위 ‘뉴노멀(New Normal, 새 일상)’이라는 새로운 삶을 학습하고 있다”고 말했다.
코로나19와 교회
코로나19는 사회, 경제적 문제일 뿐 아니라 교회의 문제도 되고 있다. 모태신자로 태어나 매주 안식일이면 예외 없이 예배당에 가서 예배를 드렸던 필자도, 요 몇 달 동안 대부분을 집에서 가족과 영상을 통해 예배를 드려야 했다.
많은 교회들이 사회적 거리두기에 동참해 온라인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예배당 예배를 절대적인 신앙의 가치로 보고, 전쟁이나 재난의 때도 중단하지 않았다며 강행하는 교회도 있다. 각기 교회를 사랑해서 내린 판단이라고 생각된다.
상당 기간 코로나 바이러스와 함께 살아야 한다면 교회가 생각할 몇 가지 문제들이 있다.
첫째는 정부가 현장예배를 강제로 중단시킨 행정명령이 합법적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헌법 제20조에서는 ‘종교의 자유’를, 제21조에서는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그러나 헌법 제37조 2항에서는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를 제한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다만, 그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법률 전문가들은 정부가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라 예배중단을 ‘강제’한 것에 대해, 외부적인 신앙실현의 자유는 제한하고 있으나, 영상예배나 가정예배 등 내면적인 신앙의 자유는 보장하고 있음으로 종교 자유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고 있다.
둘째, 어떤 통계에 의하면 국민의 80% 이상이 강제적인 예배중단을 찬성하고 있다고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우선이다. 일반 국민들에게는 예배보다 자기 생명이나 생업이 더 중요하다. 지난봄에 서울 모교회가 예배를 강행하자 주민들이 교회 앞에서 집회를 열고 예배 중단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 주민들이 곧 선교대상임을 감안할 때, 이러한 때에 교회가 주민들에게 염려를 끼치기보다 국가와 주민들의 안전에 힘쓰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셋째, 현장 예배의 중요성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어떤 분들은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는 말씀을 근거로 현장 예배나 모임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듯한 주장을 하기도 한다.
예수님 말씀의 핵심은 예배에서 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니라 예배의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께서 ‘모임’의 가치를 평가절하 하신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성회(거룩한 모임)’의 날로 선포하셨다(레 23:3). 또 사도 바울은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27)며 ‘모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초대교회는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고(행 2:46), 히브리서 기자는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더욱 모이기를 힘쓰라고 권고한다(히 10:25).
코로나19 때문에 당분간 현장 예배는 드릴 수 없다 하더라도, 온라인을 통해 예배가 계속되어야 하고, 또한 SNS(사회관계망서비스)를 활용해 목회자와 성도, 그리고 성도 간 연결이 강화되도록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해야 한다. 온택트(ontact, 연결을 뜻하는 online과 untact의 합성어)라는 신조어가 있다. 온라인을 통해 비대면으로 하는 각종 활동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 가수들의 ‘온택트 콘서트’나 회사들의 ‘온택트 회의(화상 회의)’ 등이 이러한 예다. 교회는 사회적 거리두기에 비대면 예배로 동참하면서도, 교인 간 결속을 다지는 온택트 활동에 박차를 가함으로 성도들이 방치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이 글을 마치면서, 성경 예언적 관점에서 마음에 걸리는 한 가지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4월, 히브리대학교 역사학과 교수인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는 파이낸셜 타임지에 ‘코로나 이후의 세상(the world after corona virus)’이라는 칼럼을 게재했다. 그는 코로나19 이후 우리는 “이전과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맨 먼저 세계는 ‘전체주의적인 감시체제와 시민의 권한 강화’의 갈림길에 서 있다고 지적했다. 가장 이상적인 정부형태는 ‘최소의 정부’이다. 작은 정부란 국가가 국민의 삶을 책임지는게 아니라 개인이 자신의 삶을 책임지도록 보호하고 안내하는 정부이다. 그렇게 될 때 인간은 비로소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
그러나 코로나19는 대부분의 세계 정부를 단번에 ‘큰 정부’로 변모시켰다. 분명 코로나19로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촉발한 결과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분명 깨어 기도할 때이다.
박성하 목사 / 로뎀아카데미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