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의 의미와 필요성

by 로뎀 posted Apr 30, 202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련의 의미와 필요성

수행, 수련과 멀어진 기독교

어느 종교에든 익숙한 단어인 수행(修行)이라는 단어와 그 문화가 기독교, 특히 개신교에서는 유난히 낯설다. 수행은 자신을 깨우치고 단련하는 수련과 그것의 사회적, 공동체적 행동(실천)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에서 수행에 상응하는 적확한 단어가 없다. 대신 우리는 믿음과 실천, 믿음과 행동의 통전을 강조한다. 즉 수련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낯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인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수련회’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실제 매년 교회가 진행하는 ‘수련회’ 내부를 들여다보면 본래 ‘수련’이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면 왜 우리 기독교는 자신을 성찰하면서 성서를 통해 ‘하나님 말씀’을 새롭게 듣는 렉시오 디비나(Lecico Diavina, 거룩한 독서) 수련이나 어린아이와 같은 ‘ 가난한 마음’으로 나아가려 힘쓰는 ‘예수마음수련’ 혹은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인 ‘몸’에 관심하는 ‘몸 수련’ 등 우리의 영성을 북돋는 다양한 영성수련 문화가 약한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중에 가장 심각한 원인 중의 하나는 개신교 신학의 잘못된 종교관에 있다.
기독교 신학이 갖고 있는 전형적인 종교이해 중의 하나는 기독교는 모든 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은 은총의 종교요 다른 동양종교는 인간적인 노력을 통해 자신을 완성하려는 인위적인 수행의 종교라는 도식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다. 이런 이해가 기독교인들의 무의식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해야 하고 할 수 밖에 없는 ‘경건의 훈련’조차 무시하고 지나치고 있다. 물론 기독교가 은총의 종교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은총을 제대로 받아내는 깨끗하고 온전한 ‘그릇’이 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수련을 게을리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또한 개신교의 수련문화의 빈약함은 역사적으로 볼 때 가톨릭과의 결별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  중의 하나는 초기 기독교 영성수련의 중요한 공간이었던 수도원전통을 이어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톨릭의 수도원은 하나님께 주신 ‘카리스마’(은사)가 온전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수련공간이었다. 가톨릭과의 엄격한 단절을 시도했던 프로테스탄트 신학은 수도원 전통에서 면면히 내려왔던 수련문화 또한 거부하는 잘못을 범했던 것이다.

기독교 영성수련의 의미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온전한 영성은 교리적인 믿음에 근거하여 시간에 따라 자연스럽게 축적되는 성품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과 나의 영 사이의 내밀한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매우 역동적인 실재이다. 그리고 그 영성은 감성, 지성 등과 같이 우리 인간의 한 부분의 속성이 아니라 인간을 구성하는 모든 부분의 총체적인 표현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영성이 관계하지 않는 인간현상은 없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말하는 ‘영성수련’은 단순히 종교적이고 내적인 수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영성수련은 우리의 삶에 예수의 정신이 그대로 실현되기에 필요한 그리스도인의 ‘몸 만들기’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몸은 단지 육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과 육을 다 포함하는 총체적인 의미체로서의 몸이다.

기독교 영성수련은 첫째로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제대로 보고 깨닫고 그 정체성대로 살아가게 하는 길이다. 기독교 영성수련의 특징은 그 수련을 통해 어떤 특별한 능력이나 깨달음을 얻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께서 말씀하고 삶으로 증명하신 인간의 본래 정체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체화시키는 것에 있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당시 고정관념을 깨고 모든 인간은 남녀노소, 신분, 빈부에 상관없이 모두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은 하나님과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드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엄연한 신앙실재 현실이 우리의 삶 속에서 실현되고 있는가?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 신앙 교리적으로 우리들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이며 그의 자녀라고 고백하지만 그 고백은 현실에서 화육되지 못한다. 이 이외에도 ‘새로운 피조물’로서 정체성, 하나님과 하나 된 존재로서의 정체성 등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되고 재현된 우리의 정체성은 그대로 사장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수련은 바로 우리의 본래 모습을 제대로 보는 것에 있다.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 영의 비춤을 통해서 겉모습이 아니라 그 안에 감춰진 ‘참 나’를 보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건대 기독교의 영성은 어떤 외부적인 수련법이나 기술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축적해 나가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래 모습을 보고 그 본래 모습이 나의 옛 사람의 모습에 사장되지 않고 현실 속에서 드러나도록 자신을 내어 놓는데 있다. 즉 무엇을 채우려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바라볼 수 없게 만드는 탁한 기운이장애물들을 닦고 제거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 전수하신 특별한 수련법이 없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예수님은 그 당시 아주 하나님과 소통 속에서 아주 평범하고 고전적인 방법인 ‘기도’를 강조하셨고, 그것의 유일한 방법으로 ‘주기도문’을 가르치셨다. 예수는 오히려 자신처럼 제자들이 직접 하나님과 대면하면서 하나님과 하나 되는 삶을 살기를 원하셨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제자들에게 삶을 통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보여 주신 것이다. 지금처럼 요란하게 유행되고 있는 갖가지 영성수련 방법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없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두 번째 수련의 의미는 우리의 몸에 배어있는 삶의 양식을 변화시키는데 그 뜻이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현존재인 이상 사회의 구조, 가치관, 몸의 사용 등등 다양한 삶의 양식에 적응해 갈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불행하게 우리를 둘러친 삶의 양식들이 우리 자신을 하나님과 대면하고 그의 말씀을 제대로 듣고 따라가며 실천할 수 있도록 돕지 않는다. 우리의 몸과 맘이 예수의 정신을 따르기에 이미 탁해져 있거나 굳어져 있어서 진리의 말씀대로 살고 싶어도 살아가지 못하는 현실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수련의 중요한 의미 중의 하나가 여기에 있다. 즉 기독교에서 말하는 수련은 삶의 양식으로 말미암아 몸과 맘, 그리고 영혼에 까지 스며있는 반(反) 예수정신의 굴레와 찌꺼기로부터 자신을 정화하는 길이다. 생명과 평화의 삶을 방해하는 자본주의적, 그리고 반 생태적인 삶의 양식을 생활과 정신에서 털어내는 것, 진리 안에서 자유로운 삶을 억압하는 수많은 가치관들을 수련을 통해서 걷어 낼 수 있다. 그런 가치관들은 바로 우리 무의식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단순한 결심과 결단으로 가능한 것일 아니라 수련을 통한 존재의 변화를 통해 궁극적으로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3년 동안 하나님 나라 운동을 통해서 보여준 것은 바로 이런 변화를 향한 수련의 하나였다.

기독교 수련문화 정착을 향해

기독교 수련의 진정한 의미가 우리 자신의 참 모습 즉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자녀, 새로운 피조물, 그리고 하나님과 하나 된 존재로서 자신의 참 모습을 보는 것, 그리고 그 모습 때로 살아가기 위해 우리 존재 안에 스며있는 반생명적인 습관이나 마음의 더러움을 씻어내는 것에 있다면, 이 두 차원에서의 수련은 우리 삶이 계속되는 꾸준하게 반복되고 심화되어야 한다. 이것을 위해 전통적으로 기독교는 기도와 말씀읽기를 강조한다. 수련 차원에서 기도는 하나님께 무엇을 바라는 행위로서의 간구가 아니라 하나님과 대화하고 소통으로서 기도이다. 하나님과의 대화는 우리의 마음이 깨끗하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을 대면하지 못하는 자가 하나님과 대화할 수 없고, 마음이 깨끗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대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욕심과 의심, 불안과 걱정, 미움과 집착을 바로 보고 그것을 거룩한 영의 도움을 깨끗하게 하는 수련과정은 일상의 수련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 말씀을 눈으로 읽어도 그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눈과 귀가 먼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말씀을 읽고 듣고, 깨닫고 실천하는 과정은 필수적인 수련이다.
오늘 우리 개신교 수련문화를 정립해야할 때이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받은 ‘카리스마’(은사) 온전하게 드러낼 수 있는 다양한 수련문화들이 정착되어야 한다. 이것을 위해 교회와 신학은 ‘무늬만 수련’이 아니라 실제 존재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개신교 수련의 전통을 세워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수련을 위해 필요하다면 이웃종교들이 실행해오고 있는 다양한 수련법도 신학적으로 재해석하면 우리의 수련법으로 정착시키는 노력도 필요하다. 더불어 개 교회는 모든 신앙 활동 들(예배, 교육, 봉사)에 ‘영성수련’의 의미를 더욱 강하게 부여하고 실제로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수련이 될 수 있도록 내용을 채워가야 할 것이다.
성서가 말한 대로 육체를 위해 몸의 훈련이 필요하듯 영적인 것을 위해 영성의 수련은 필수적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평화의 군사로서 이 수련을 게을리 한다면 그리스도의 삶 또한 연약하게 되어 반(反) 그리스도적, 반(反) 생명적, 반(反) 평화적 문화를 대항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교회의 수련회 계절이 다가온다. 한 교회 안에서도 각 부서별 수련회로 여러 수련회가 진행된다. 이번 수련회는 말 그대로 교회 공동체가 새롭게 거듭나는 본격적인 영성수련의 기회가 되기를 희망해 본다.

김 진 목사 / 예수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