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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24 10:45

경건을 연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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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필자가 전에 각종 잡지에 기고했거나 설교한 글을 옮긴 것입니다.

 

경건을 연습하라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딤전 4:7-9)

경건은 거룩이라는 말과 동일한 말입니다. 거룩이란 본래 “구별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도(聖徒)란 구별된 사람을 뜻하고, 성전(聖殿)이란 구별된 장소를 뜻합니다. 또한 성물(聖物)이란 구별된 물건들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약 1:27에서는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이 아니하는”것이 거룩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을 요구하십니다. 벧전 1:16에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셨고 히 12:14에는 이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경건을 연습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안식일에만 경건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만 경건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경건을 연습한다는 것은 반복된 훈련에 의해 경건한 습관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 말을 하면서 고대 운동선수들이 시합에 나가기 전에 훈련하던 모습을 생각했습니다. 운동선수들은 자신이 출전할 종목에 익숙해지도록 반복훈련을 합니다. 그 연습이 우승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고대 올림픽에서 우승한 선수에게는 올리브가지로 만든 관과 야자열매를 주었다고 합니다. 1회부터 6회까지는 사과를 주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보상은 명예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속한 가문과 부족에게 큰 영광을 안겨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명예는 약간의 유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보니까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면 평생 연금을 받게 되어 유익이 좀 많아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금생에만 유익한 것입니다. 그것이 결코 영생을 책임져 주지 않습니다. 이에 비하여 경건의 연습은 범사에 유익하니 곧 금생과 내세에 약속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습관이란 항구적으로 굳어버린 사고나 감정의 선택을 의미합니다. 처음에는 우연한 것이 반복에 의하여 습관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본래는 다만 우연이거나 혹은 본능적이었던 것이 점차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습관으로 굳어져 버립니다.
어린 아이의 활동의 본능이 근면의 습성이 되고, 호기심의 본능이 탐구의 습관이 됩니다. 또 모방의 본능이 남의 장점을 본받는 습성이 되고, 신뢰의 본성이 신앙으로 성숙해 갑니다. 그러나 반대로 장난치는 본성이 경솔함의 습성이 되고, 싸우는 본능이 부질없는 논쟁의 습성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연한 것이나 혹은 본능적인 것들을 어떻게 훈련하고 연습하느냐에 따라 그것이 습관이 되고 습관은 우리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 중에 “생각을 뿌리면 행위로 거두고, 행위를 뿌리면 습관을 거두고, 습관을 뿌리면 성품을 거두고, 성품을 거두면 운명을 거둔다.”는 말이 있습니다. 러시아의 유명한 도스또예프스키는 “사람의 나중의 반 생애는 보통 그 이전의 반생애에 쌓아진 습관만으로 이루어진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습관은 우리 인생에 큰 활력과 힘이 되지마는 나쁜 습관은 평생에 멍에가 되는 것입니다.
한번 형성된 습관은 고치기가 어렵습니다. 한번은 영국에서 한 목사가 나쁜 습관을 버리는 방법에 대한 글을 모집하여 그 결과가 신문에 발표되었는데 대상을 받은 사람은 아홉 살짜리 소년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영어의 「습관」을 나타내는 habit이란 말을 사용하여 한 문장을 만들었습니다.
“습관은 이겨내기 어렵다. 첫 글자 한 자를 떼어낸다 해서 ‘많이’ 바꿀 수는 없다.”
habit의 첫 글자 h를 떼면, a bit 부사적으로 “약간”이라는 뜻이 됩니다. 습관은 버리려고 노력해도 약간만 고쳐진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입니다.
“한 자를 더 떼어내도 ‘많은’ 부분이 남아 있다.”
a bit에서 a를 떼면 bit 즉 “작은 조각”이란 뜻이 됩니다. 더 노력해도 단지 작은 조각만 떨어져 나갈 뿐 아직 많은 부분이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입니다.
“또 한자를 더 떼어낸다 하더라도 ‘그것’의 전체의 모습은 남아있다.”
bit에서 b를 떼어내면 it 즉 “그것”이란 뜻이 됩니다. 즉 습관을 고치려고 노력해도 아직도 그것의 전체 모습은 여전히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입니다.
“또 한 자를 떼어낸다 하더라도 충분히 사용할 수 있다.”
it에서 i를 떼어내면 t가 남는데요, 이것은 알파벳으로 사용할 수도 있고 셔츠나 그밖에 다른 약자로 여전히 사용이 가능합니다. 제가 이걸 설명하니까 어떤 여 집사님이 “아직도 티가 난다”고 해석을 하더군요. 습관은 네 자를 다 떼어내도 여전히 쓸모가 있다는 말로서 우리가 한번 어떤 습관을 형성하면 거의 대부분을 고쳐도 습관은 여전히 우리의 생애에 영향을 미친다는 뜻입니다. 마지막 문장입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습관을 떼어 버리기를 원한다면 ‘한꺼번에 다 내던져 버려야만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습관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큰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운명을 파국으로 몰고 갈 위험한 습관들도 있습니다. 엘렌 G. 화잇은 교회증언 4권 654쪽에서 “악한 습관들을 정복하지 않으면 그것들이 우리를 정복하고 우리의 행복을 파괴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극복해야 할 위험한 습관들은 무엇일까요?

1. 지금 당장할 일을 나중이나 후에 편리한 때로 미루는 습관입니다.
저는 꽤 영민한 두뇌를 가지고 있지만 이런 습관 때문에 자신의 능력에 걸맞는 일을 이루지 못하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압니다. 이것은 흔히 나타나는 습관입니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것은 편리한 방법인지는 모르지만 현명한 방법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내일은 바보들의 지혜의 날이요, 악한들의 정직의 날이요, 미루기를 잘하는 사람의 결정의 날이요, 게으른 자들의 행동의 날이며, 죄인들의 회개의 날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바보들은 오늘 하루만 놀고 내일은 공부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악한들은 오늘만 도둑질을 하고 내일은 끊겠다고 생각합니다. 늘 미루는 사람은 내일은 결정하겠다고 합니다. 게으른 사람은 내일은 아침 일찍 일어나겠다고 말합니다. 죄인들은 내일 회개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그런 내일은 결코 오지 않습니다. 오래 전에 러시아의 독재 군주였던 피터 대제는 죽는 순간까지 유언을 미루다가 직전에 급히 필기 도구를 달라고 해서 “give all to”(내 모든 것을 주노라)까지만 쓰고는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정작 자신의 유산을 누가 상속받아야 할지 그 이름을 쓰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사단이 그리스도인들을 멸망시키는 네 종류의 말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누구나 다 하는 일이니까”, 둘째는 “이까짓 껄 뭐”, 셋째는 “이번 한번만”, 넷째는 “아직 기회가 있으니까”입니다.
네 종류의 유혹 중에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자 미상의 시 가운데 다음과 같은 시가 있습니다. 이것은 본문을 제가 좀 고친 것입니다.
    할 일이 생각나거든 지금 하십시오.
    오늘 하늘은 맑지만 내일은 구름이 보일는지 모릅니다.
    친절한 말 한 마디가 생각나거든 지금 하십시오.
    내일은 당신의 것이 안 될는지 모릅니다.
    미소를 짓고 싶거든 지금 하십시오.
    내일은 당신의 친구가 떠날는지 모릅니다.
    불러야 할 노래가 있다면 지금 부르십시오.
    당신의 해가 저물면 노래 부르기엔 너무 늦습니다.
    당신의 노래를 지금 부르십시오.

  그렇습니다. 미루는 것은 위험합니다. 지금 당장 여러분의 할 일을 시작하십시요. 그러면 큰 축복이 있습니다.

2. 두 번째 나쁜 습관은 게으름입니다.
스피노자는 “전진하는데 있어서, 자기만족이 잉태하기 쉬운 나태보다 더 무서운 적은 없다”고 했습니다. 성경도 게으름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잠 6:6에 보면 “게으른 자는 개미에게 배우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근면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J. 레놀즈라는 사람은 “그대가 만약 위대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면 근면은 이들 재능을 더욱 발달시킬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만약 평범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면 근면은 결점을 보충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근면하고 게으른 차이는 아침에 얼마나 일찍 일어나느냐 보다 자기 일에 얼마나 성실한가에 달려있습니다.
기왕 신앙생활을 한다면 부지런해야 합니다. 부지런하지 않으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기 어렵습니다. 롬 12:11에서는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하였고 벧전 3:13에는 “열심으로 선을 행하라”고 하였고 4:8에서는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주를 섬기는 일에나 혹은 선을 행하는 일, 사랑하는 일에도 부지런함이 필요합니다. 엘렌 G. 화잇은 실물교훈 343쪽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사 현세의 일에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이 일을 부지런히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 못지않게 참된 신앙의 일부를 이룬다. 성경은 게으름을 시인하지 않았다. 게으름은 세상을 괴롭히는 최대의 저주이다. 참으로 거듭난 남녀라면 모두 부지런히 일하는 자가 될 것이다.”(실물, 343)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실물교훈 284쪽에서는 “게으름뱅이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실물, 284)고까지 하였습니다.

3. 셋째로 나쁜 습관은 방종입니다.
그것이 식욕이든지 탐욕이든지 야망이든지간에 자기 자신의 만족과 이익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습관을 의미합니다. 식욕의 방종은 더러운 정욕을 탐하게 하고, 탐욕의 방종은 다른 사람에 대하여 무자비하게 합니다. 야망의 방종은 다른 사람을 짓밟게 합니다. 무엇이든지 방종하는 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이 밖에 말이나 돈을 사용하는 일에도 방종은 언제나 위험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이런 말씀을 들으면서 아, 이제 이것 혹은 저것들을 하지 말아야지 하고 결심하는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이런 것들은 고치려고 해서는 불가능의 벽에 부딪히게 됩니다. 학자들은 인간에게 한번 형성된 습관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다만 이것들은 다른 선한 습관에 의해 대체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나쁜 습관을 버리라”고 말하지 않고 “경건을 연습하라”고 말합니다. 경건을 연습해서 새로운 습관을 가질 때, 우리는 나쁜 습관을 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유익하게 하는 세 가지 습관이 있습니다. 곧 “집중하는 습관”과 “완벽을 추구하는 습관”과 “인내하는 습관”입니다. 이 세 가지의 습관만 가지고 있으면 중간 정도의 천부적 재능을 가진 사람도 위대한 학자나 발명가나 웅변가로 성장할 수 있다고 합니다.
집중력이란 볼록렌즈처럼 그가 가진 모든 재능을 한 곳으로 모아 주어 큰 힘을 발휘하게 합니다. 완벽성은 결론이 날 때까지 파고드는 습관인데 대부분은 대충 훑어보기 때문에 제대로 하는 것이 없습니다. 인내는 집중력과 완벽성의 기초가 됩니다.
이런 것들은 특히 신앙생활에서도 필요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나 설교를 들을 때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믿는 바를 완전하게 알고 이해하려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기는 하지만 완전한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엘렌 G. 화잇은 실물교훈 117쪽에서 “그들은 거의 그리스도인이 되기는 하였으나 아직 완전한 그리스도인은 아니다. 그들은 거의 하늘나라에 가까이 이른 것같이 보이나 그 곳에 들어갈 수는 없다. 구원을 거의 얻었으나 온전히 얻지 못했다는 말은 거의 잃어버렸다는 말이 아니라 완전히 잃어버렸다는 뜻이다.”(실물, 117)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그리스도인을 찾고 계십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행위에 있어서 완전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온전히 그리스도께 헌신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한발은 천국에 한발은 세상에 딛고 있는 자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로 하여금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연습을 하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운전을 하거나 자전가를 타는 데도 연습이 필요한 것처럼, 경건한 생애를 사는데도 연습이 필요합니다. 경건한 생애를 위해 가장 기초적이면서 필수적인 신앙습관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1) 첫째는 성경을 연구하는 습관입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연주회를 먼저 하고 나중에 악기를 조율하지 말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하라. 그러고 나서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려고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연주를 먼저하고 악기를 조율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조화된 생애를 살기 위해서는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이 필요합니다.
제가 군에 있을 때 어떤 친구는 아침에 일어나거나 식사를 마치면 꼭 담배를 한대 피우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성경을 읽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 습관이 저에게 얼마나 많은 유익을 주었는지 모릅니다. 저는 이 습관을 통해 군에 있는 동안 성경을 두 번 통독할 수 있었고, 제대 후에 성경과 예언의 신, 그리고 많은 책들을 읽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나에게 헤아릴 수 없는 도움을 주었습니다.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서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보는 것은 여행을 출발하기 전에 지도나 안내서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도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말씀을 읽음으로 많은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2) 경건한 생애를 위해 연습해야 할 두 번째 습관은 은밀한 기도의 습관입니다.
마 6:6에서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영어 KJV 성경에 보면 6절 한절에 「너」라는 단수 대명사가 8번이나 들어가 있습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기도하는 습관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기도의 밀실에 들어가지 않고는 결코 경건에 이르지 못합니다.
은밀한 기도는 우리가 마치 감동적인 음악을 들은 것처럼 우리에게 거룩한 영향력을 오래도록 유지하게 합니다. 기도의 밀실에 들어가 무릎 꿇을 때 주변에 역사하는 성령의 부드러우면서도 중압감 넘치는 은혜를 경험 수 있습니다. 이런 경험은 하루동안 우리의 눈과 입에 거룩한 파수꾼을 두게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가 부족합니다. 식사 때 드리는 것과 같은 습관적인 기도는 많이 하지만 개인적으로 은밀히 자기의 마음을 주님 앞에 토로하지 않기 때문에 수다스러워지고 감정의 변화가 많아집니다. 기도의 밀실로 습관적으로 들어가십시요. 이것이 이생과 내세에 큰 유익을 주는 경건의 연습입니다.

  (3) 경건한 생애를 위해 연습해야 할 세 번째 습관은 남을 위한 봉사습관입니다.
봉사의 가장 큰 유익은 쓸데없는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게 합니다. 알렉산더 막클라렌은 “눈을 당신 자신에게서 다른 곳으로 돌려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쓸데없이 낙심에 빠지거나 어리석은 추측으로 시간을 낭비하거나 할 것이다. 어떤 경우든 간에 당신의 영혼은 고통을 당할 것이다. 세상, 인간, 자기 자신 그리고 모든 것으로부터 눈을 돌려라.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라”고 하였습니다.
자신보다 외부에 몰두하는 사람은 구원에 대하여 의심하거나 두려움에 빠지지 않습니다. 우울증으로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자기 자신에게 집착할 때 우울증은 심화됩니다. 우울증을 가진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위한 봉사활동을 통해서 우울증에서 치료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봉사는 다른 사람에게만 유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큰 유익이 됩니다. 중국 속담에 “남에게 장미를 건네주는 사람의 손에는 약간의 향기가 남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봉사는 다른 사람 뿐 아니라 나를 향기롭게 합니다.
죄는 인간의 마음에 이기심이라는 고질병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기심은 자기를 사랑하는데서 오는 것이지만 이것은 진정으로 자기를 불행하게 한다는데 비극이 있습니다. 이 질병은 봉사라는 유일의 약으로만 치료됩니다. 다른 교회와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할 때 우리는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깨끗해지는지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습관과 은밀히 기도하는 습관 그리고 남을 위해 봉사하는 습관, 이 세 가지는 모든 경건의 기초를 이루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경건의 연습을 시작하십시오. 그리고 이것을 통해 금세 뿐 아니라 내세에도 큰 유익을 얻게 되기 바랍니다.

박성하 목사 / 로뎀아카데미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