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의 영성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눅 17:4)
예수님은 용서에 관해 여러 번 교훈하셨습니다. ‘주의 기도문’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라고 기도하라고 하셨고,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에서는 죄지은 자를 용서해야 할 이유를 설명하셨습니다.
그러나 막상 자신이 피해 당사자가 되면 용서가 쉽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내 아이를 유괴하여 죽인 살인범이나 자신을 성폭행한 가해자를 용서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평생 모은 돈을 떼먹거나 신의를 배신하였거나 거짓으로 명예를 훼손한 사람을 용서하는 일도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C. S. 루이스는 “사람들은 용서가 아름다운 일이라고 말한다. 정작 자신이 용서할 일을 당하기 전까지는”이라고 말했습니다. 피해를 입고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왜 용서를 하지 않느냐’, ‘사랑이 부족하다’고 겁박하는 것은 용서라는 이름의 또 다른 폭력입니다.
오늘 기억절은 용서에 관한 핵심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가해자가 사과하고 용서를 빌 때’ 그 진정성 여부를 따지지 말고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도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더 큰 용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진정한 용서란 어떤 경우에도 처벌과 보상을 면제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남습니다. 엘렌 G. 화잇은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를 설명하면서 “이 말씀은 우리가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빚진 자들로부터 마땅히 받아야 할 것도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실물, 247)라고 하였습니다.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하여 나병에 걸렸을 때, 모세가 탄원하자 하나님께서는 즉시 미리암의 죄를 용서하셨지만 칠 일간 격리시켜 처벌하셨습니다(민 12장). 다윗도 회개할 때 죄는 즉각 용서받았지만, 범죄로 낳은 아이는 죽어야 했습니다(삼하 12:13~14). 용서는 복수를 포기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보상과 처벌을 면제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피해자의 편입니다. ‘용서하라’는 말씀은 원수가 아니라 피해자를 위해 하신 말씀입니다.
원망과 분노는 원수가 아니라 자신을 해칩니다. ‘원망하다, 분노하다(resent)’라는 영어 단어는 ‘다시 느끼다’라는 프랑스어에서 나온 것입니다.
원망하면 과거의 고통을 다시 느끼게 됩니다.
용서만이 분노와 절망, 자기 파괴적인 고통을 치유하고, 가해자와 그 사건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나게 해 줍니다.
원수를 사랑할 만큼 어질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자신의 건강과 평안을 위하여 원수를 용서하고 잊어야 합니다.
박성하 / 로뎀아카데미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