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글은 필자가 전에 각종 잡지에 쓴 것이나 설교문을 옮긴 것입니다.
사소한 것에 목숨걸지 말라
“너는 저희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니라”(딤후 2:14)
고사성어 중에 소탐대실(小貪大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작은 것을 탐하다 큰 손실을 입는다는 뜻입니다. 전국시대에 진(秦)나라의 혜왕(蕙王)이 촉(蜀)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계략을 짰습니다. 촉나라 제후가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돌로 소 다섯 마리를 만든 다음, 그 속에 황금과 비단을 채워넣고 “소가 금 똥을 눈다”는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그리고는 촉 나라 제후에게 우호의 예물로 보내겠다고 하였습니다. 촉 나라 제후는 예물에 눈이 어두워 신하들의 간언을 듣지 않고 백성들을 징발하여 금 똥을 누는 소를 맞을 길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도성의 교외까지 몸소 나와 맞이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진나라 병사들이 숨겨 두었던 무기를 꺼내 촉 나라 제후를 사로잡았고, 결국 촉 나라는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작은 것을 탐하다 나라를 망하게 한 것입니다.
사소한 일로 인생을 망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2008년 9월 24일, 경남 하동의 진구지 마을 방파제에서 40살 된 A씨가 낚시를 하다, 새벽 3시 20분 쯤 집에 돌아가려고 짐을 챙기고 있었습니다. 그때 근처에서 낚시하던 B씨가 “쓰레기를 치우고 가라”고 말하자 격분하여 시비를 벌이다 흉기로 찔러 숨지게 했습니다. 쓰레기 치우고 가라는 말이 살인까지 할 일입니까? 죽은 사람도 억울하고, 죽인 사람도 순간의 분을 참지 못해 결국 남은 삶을 감옥에서 보내게 되었습니다.
잠언 26장 17절에 보면 “길로 지나다가 자기에게 상관없는 다툼을 간섭하는 자는 개 귀를 잡는 자와 같으니라”(잠 26:17)고 하였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개 귀를 잡으면 어떻게 됩니까? 개에게 물리지요. 사람들은 자기와 상관이 없는 일인데도 간섭을 하다 화를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사소한 사건을 큰 사고로 만드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전도서 7장 16, 17절에 보면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케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 말며 우매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느냐(전 7:16, 17)고 하였습니다.
공연히 남의 일에 간섭하는 것도 문제고, 그랬다고 살인까지 저질르는 것은 더 큰 문제입니다.
1. 사소한 일에 과잉반응 하지 말라.
사람들은 사소한 일에 과잉반응을 하는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실제 사건은 별것이 아닌데 그 결과는 엄청난 사고를 초래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 남자들, 운전을 하다 누가 갑자기 끼어들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솔직히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지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쫓아가 멱살을 잡고 싸움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달리 생각해 보면, 그 사람이 얌체라서가 아니라 길을 잘 몰라서 미리 차선을 바꾸지 못해서 끼어들 수도 있고, 무언가 급한 일이 있어 염치불구하고 새치기를 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지나쳐도 큰 손해볼 것 없습니다.
잠언 20장 3절에 “다툼을 멀리 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어늘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잠 20:3)고 하였습니다. 가급적 다툼을 피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행복을 지키고, 다른 사람의 문제에 휩쓸리는 실수를 피할 수 있습니다.
모든 다툼은 분노를 일으킵니다. 프레드릭 뷔히너(Frederick Buechner)는 분노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상처를 핥고, 오래 된 원한에 입맛을 다시며, 앞으로 맞붙어 싸울 전망에 혀를 굴리며, 당신이 당한 고통과 당신이 되돌려주는 고통을 마지막까지 맛있게 먹는 것-이것이 분노인데, 이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임금님 상의 진수성찬이다. 가장 큰 문제는 당신이 게걸스럽게 당신 자신을 먹어 치운다는 것이다. 잔치 후에 남는 뼈다귀는 당신 자신이다.”
누군가 얌체 짓을 할 때, 누군가 내게 실수할 때, 불쾌하게 할 때, 배은망덕할 때, 우리는 자동으로 분노하게 됩니다. 분노는 경쟁에서 이기고, 자기 권리를 지키고, 자기를 보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분노는 몸에서 화학적 성분을 방출하게 하고 그것이 결국 나를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장 26, 27절에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존경받는 명사 중 한 사람이며, 심리 치료사인 리처드 칼슨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분은 “당신은 다시 행복해질 수 있다”, “치료로 가는 지름길” 등 여러 책을 저술했는데 현재 100여 개국에 번역되었고, 뷰, 오프라 윈프리, 투데이, CNN 등 유명 방송 쇼에 출연하여 활동하고 있습니다.
칼슨 박사는 그의 책 “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의 서문에서 자신의 한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외국에 있는 한 출판사가 자신의 책을 번역하여 출판하게 되었는데, 책 홍보를 위해 베스트셀러 작가인 웨인 다이어 박사의 서명을 실을 수 있게 도와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칼슨 박사는 다이어 박사에게 편지를 보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답장이 오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이어 박사가 거절한 것으로 생각하고 출판사에 그의 서명을 실을 수 없게 되었다고 알렸습니다. 6개월이 지난 후 번역된 책 한권을 받아 든 칼슨 박사는 깜짝 놀랐습니다. 책표지 오른쪽에 다이어 박사가 다른 책에 허락한 서명이 떡 하니 인쇄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칼슨 박사는 무척 화가 났고, 법적인 문제도 생길 수 있기 때문에 매우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출판사에 즉시 책을 회수하라고 요구하고, 다이어 박사에게 사과 편지를 보내 상황을 설명하고 수습 방안을 의논했습니다. 편지를 보내고 어떤 회신이 올지 노심초사 하며 몇 주를 기다리고 있는데 드디어 답장이 왔습니다. 그 편지를 이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리처드, 조화롭게 사는 데는 두 가지 규칙이 있소. 첫째, 사소한 것에 연연하지 말라. 둘째, 모든 것은 다 사소하다. 서명은 그냥 쓰게 놔두시오. 친애하는 웨인”
이 얼마나 멋진 답장입니까? 다이어 박사는 자신의 허락 없이 서명을 사용한 일에 대해 분노하고, 법적 책임을 물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다투는 것보다 조화롭게 사는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18절에서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롬 12:18)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다툴 수도 있으나, 다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분은 침묵하는 것은 비겁한 것이요, 불의에 굴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이어 박사의 말을 명심하십시오.
첫째, 사소한 것에 연연하지 말라. 둘째, 모든 것은 다 사소하다. 물론 이 세상에 목숨을 걸만한 일들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생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것입니다. 조금만 차분히 들여다보면 대부분 별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공자는 “오해를 받거나 도적을 당하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잊어버리기만 하면 결국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였습니다. 사소한 일에 과잉반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2. 남을 탓하지 말라.
어느 대학 교수가 말썽꾸러기 학생을 보면서 불평을 했습니다.
“중․고등학교가 문제야. 중․고등학교 때 잘 가르쳤어야지. 그때 교육이 잘못돼서 그래.”
중․고등학교 교사에게 물어보자
“애당초 초등학교가 문제입니다. 기초가 잘못됐기 때문에 애들이 이 모양입니다.”
초등학교 교사에게 묻자
“유치원이 문제예요. 유치원에서 습관을 잘못 들여서 그래요.”
유치원 선생님한테 물어 보자
“가정교육이 문제입니다. 가정교육이 잘 돼야지요.”
엄마한테 물어보자
“종자가 좋아야지…….”
그러자 아빠가 펄쩍 뛰며 말합니다.
“무슨 소리야! 종자야 좋지. 밭이 못돼서 그렇지.”
사람들은 일이 자신이 원하는대로 잘 되지 않을 때, 다른 사람이나 환경을 탓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책임을 회피함으로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문제는 결국 잘못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킴으로 갈등과 다툼을 일으키게 되고, 그것이 평화로운 삶을 파괴한다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5장 9절에는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약 5:9)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옛날에 부자집과 가난한 집이 담 하나를 두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부자집은 날마다 싸우고 때려 부수는데, 가난한 집은 늘 웃음이 그치지 않고 화목하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한번은 부자집 할머니가 가난한 집 할머니에게 그 비결을 묻자 가난한 집 할머니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 집에는요 전부 죄인끼리 모여 삽니다. 무슨 일이 잘못되면 다 내 탓이요, 내 잘못이요 그럽니다. 그러니까 다 죄인이지. 그런데 당신네는 보니까 모두 의인들만 삽디다. 전부 자기가 잘했고, 잘못된 것은 다 다른 사람 탓이고, 전부가 잘 났다는 사람끼리 사니까 싸움이 그치지 않지.”
“우리는 죄인끼리 산다.” 이 얼마나 중요한 말입니까? 죄인이 더 많아야겠습니다. 네 탓이 아니라 내 탓이라고 말해야겠습니다. 오래 전에 모 종단에서 “내 탓이오”라는 운동을 벌인 적이 있었습니다만, 이러한 구호가 우리 가정, 우리 교회에서 실천된다면 그곳이 곧 천국이 될 것입니다.
늘 다른 사람 탓을 하는 사람은, 사실 자신을 스스로 약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다른 사람이나 환경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게 내 탓이라고 말하는 것이 억울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이야말로 나를 강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환경이나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받기보다 오히려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말도 되기 때문입니다.
리처드 칼슨 박사는 “다른 사람이 일으킨 문제로 좌절하게 되는 일도 분명히 있지만, 그러한 상황에 대처하고, 마지막까지 자신의 행복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은 바로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다. 상황은 사람을 구속하지 않는다. 단지 그 사람의 됨됨이를 드러내 줄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자체가 나를 화나게 하거나 낙심시킬 수는 없는 것입니다. 화는 내가 내는 것이고, 실망도 내가 선택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주변 상황은 나를 자극할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나의 행복을 앗아갈 수는 없습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단은 우리는 유혹할 수는 있지만 죄를 짓게 하지는 못합니다.
엘렌 G. 화잇은 각 시대의 대쟁투 510쪽에서 “자신이 동의하지 않으면 사단에게 정복당할 수 없다. 유혹자는 사람의 의지를 지배하거나 죄를 범하도록 강제할 능력이 조금도 없다. 그는 사람을 괴롭힐 수는 있어도 더럽힐 수는 없다. 그는 번민케 할 수는 있으나 죄에 물들게 할 수는 없다”(쟁투, 510)고 하였습니다. 교회증언 4권 623쪽에서는 “사단의 모든 군대의 힘으로도 유혹받는 자를 범죄하게 하지는 못한다.”(4증언, 623)고 하였습니다. 내가 선택하지 않는한 어느 누구도, 심지어 사단도 모든 군대로 나를 범죄하게 할 수 없으며, 나의 평안을 깨뜨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탓하거나 원망하지 마십시오. 아니 단순히 원망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주변환경을 적극적으로 변화시키십시오. 집안이 어질러져 있다면, 아무도 집안일 거드는 사람이 없고 나만 죽도록 일한다고 원망하지 말고, 가벼운 마음으로 어질러져 있는 것을 치우면 됩니다. 그래도 화가 나면 “아이고, 내 팔자지 뭐.” 이렇게 중얼거려 보십시오. 그러면 마음이 훨씬 편해질 것입니다.
3.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는 습관을 버려라.
우리나라 사람들, 남의 일에 간섭하기 참 좋아합니다. 서양 사람들은 아침에 만나면 단순히 “Good morning.”이라고 인사를 합니다. 이 말은 “May you have a good morning.” 즉 “좋은 아침이 되기 바랍니다.”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떻게 인사합니까? “진지 드셨습니까?” 남이야 아침을 먹든 말든 그걸 왜 물어봅니까? 길에서 만나면 “어디 가십니까?” 남이야 어딜 가든 그걸 왜 물어봅니까? 하여튼 우리는 다른 사람 걱정 많이 하고 삽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이 나와 다른 생각을 하거나, 행동을 하면 그걸 가만히 보고 못 지나갑니다. 인터넷에서도 자기 생각과 맞지 않는 사람을 찾아다니며 논쟁을 벌이는 사람이 있고, 그 때문에 상처를 받고 자살까지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15절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벧전 4:15)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소위 바른 말을 잘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또 그분들이 지적이 옳은 경우가 많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순되고 잘못된 것들을 잘 인식하지 못하거나 혹 알더라도 그냥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지나칩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매우 민감하게 인식하고, 그대로 두면 불편해서 견디지 못하는 성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런 습관이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는데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고 자신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매우 피곤한 일이고, 때로는 다툼을 일으키고, 결정적으로는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소외시켜 외톨이가 되게 합니다.
중요한 것은 “옳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행복하기를 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배타적이어서 옳기를 선택하면 불행해지고, 행복하려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선택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옳고 불행하게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잘못된 것이 좀 있지만 참고 행복하게 사시겠습니까? 선택은 여러분의 것이고, 그 선택이 어려분의 운명이 됩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의 생각이 틀리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자신의 의무이며, 그것이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충고를 들은 사람들은 자신에게 매우 고마워하거나 최소한 뭔가를 배울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스스로 생각해 보십시오. 누군가 나에게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할 때 “아, 내가 틀리고 당신이 옳다는 것을 알려줘서 고맙습니다. 이제야 제대로 알았습니다. 정말 당신은 나의 은인입니다.”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까?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잘못을 지적받는 것을 싫어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적하신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호세아 8장 12절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저를 위하여 내 율법을 만 가지로 기록하였으나 저희가 관계 없는 것으로 여기도다”(호 8:12)고 한탄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지적받기보다,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동의하고, 인정해 주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인간의 가장 큰 욕망 중 하나입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이 상담법의 기본이며,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존중받는 비결입니다.
그렇다고 불의를 보고 항상 참으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명백한 죄를 죄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항상 나만 옳다는 생각에 빠져 있고, 본인은 가끔이라고 하지만 하는 말마다 다른 사람의 잘못된 것만 이야기 하는 것은 문제가 됩니다. 또 잘못을 지적하더라도 기어이 상대방의 생각을 바꾸고, 버르장머리를 뜯어 고쳐놓겠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상대방의 인격을 고려해서 관계를 손상시키지 않을 정도만 의견을 이야기한 다음에는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요 조화롭게 사는 비결입니다.
가려뽑은 기별 1권 170쪽입니다.
“사단은 만일 자기가, 사람들의 정신을 경박하고 하찮은 것들에 열중케 할 수 있다면 저들이 중요한 문제들을 거들떠보지 않게 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사단은 경박하고 사소한 문제들을 생각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위해서 풍부한 재료들을 준비해 놓을 것이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의 문제는 구원과 관련이 없는 여러 관습이나 구전에 매달리면서 정작 하나님의 말씀의 보배로운 진리들을 외면하는데 있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첫째, 사소한 것에 연연하지 말라. 둘째, 모든 것은 다 사소하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는 습관을 버리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지만 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그렇게 하면 주변 사람들이 더 정다운 모습으로 변할 것이고, 더 평화롭게 살게 될 것이고, 함께 기쁨을 누리고, 함께 행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처음에 읽었던 디모데후서 2장 14절의 말씀을 다시 한번 읽고 마치겠습니다.
“너는 저희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니라”(딤후 2:14)
박성하 / 로뎀아카데미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