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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글은 필자가 전에 각종 잡지에 쓴 것이나 설교문을 옮긴 것입니다.

 

집착이 없는 삶이 현명하다

“형님, 다른 사람 주기에는 너무 아까워요. 와서 구경만이라도 해봐요.”
몇 년 전, 동생이 신내동의 한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됐다. 전에 살던 할머니가 혼자 살다 치매로 요양병원에 입원하면서 가구를 비롯해 살림살이 대부분을 남겨두고 갔다고 한다. 동생은 아는 사람들에게 연락해 안방에 있는 장롱을 제외하고 필요한대로 가져가라고 했다. 거실에 있는 장식장은 책이 많은 내가 생각나서 전화를 한 것이다. 많은 책들을 옮길 생각을 하니 귀찮은 생각이 들어 다른 사람에게 주라고 했지만, 동생은 집 구경도 할 겸 다녀가라고 했다.
가서 보니 살림살이들이 내가 생각한 그런 허름한 것들이 아니었다. 안방에 화려한 자개장식이 수놓인 장롱은 천만원이 넘는 것이라고 했다. 냉장고, 세탁기, 가스렌지 모두 크고 새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장식장도 동생의 말대로 꽤 쓸만했다. 조금 있으려니 동생의 연락을 받은 사람들이 몰려와 제각기 필요한 것들을 내어가기 시작했다. 건너방에서 커다란 오디오 세트를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들어가 보니 속이 텅비어 있었다. 아까운 마음에 물어보니 복덕방 주인이 가져갔다고 했다. 아내가 화문석 몇 개를 챙겨 놓았지만, 누군가가 자기가 먼저 맡은 것이라고 해서 가져가라고 했다.
집에 돌아오면서 아내에게 말했다. “오디오 세트가 아깝다. 진작 가볼걸.” 아내가 웃으며 말했다. “본래 우리 것도 아니었는데 뭐가 아까워요. 그냥 안 봤다고 생각하세요.” 나는 껄껄 웃으며 속으로 아내의 말을 따라 했다. “그래 안 봤다고 생각하자.” 그러자 아깝다는 생각이 사라졌다.

■ 사성제(四聖諦)
석가모니가 득도한 후 녹야원에서 최초로 설법한 것이 사성제인데, 네 가지 거룩한 진리라는 뜻이다. 이것은 불교의 핵심교리로서 “중아함경”에는 “모든 동물의 발자국이 코끼리의 발자국 안에 들어갈 수 있듯이 모든 가르침은 사성제 안에 수렴된다.”고 하였다.
첫째는 고성제(苦聖諦)인데, 인생 그 자체는 모두 고통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집성제(集聖諦)인데 고통은 마음속의 번뇌와 갈등이 쌓여 생긴다는 것이다. 셋째는 멸성제(滅聖諦)인데 고통의 원인이 소멸된 상태 즉 해탈(解脫)과 열반(涅槃)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넷째는 도성제(道聖諦)인데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는 수행 방법으로 팔정도(八正道)라 한다.
석가모니는 모든 괴로움의 원인을 갈애(渴愛)와 탐욕으로 파악하였다. 그것은 감각적인 쾌락에의 갈망과 집착, 존재와 그 생성에 관한 갈망과 집착,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갈망과 집착이다. 갈애를 남김없이 소멸시키고, 그것을 버리며, 거기에서부터 벗어나고, 그것에 집착하지 않음으로 해탈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성경도 인생은 고통이며, 고통의 대부분의 원인은 욕심 때문이라고 가르친다.
“인생살이 기껏해야 한 칠십 년 건강하게 살아도 팔십 년인데 그 인생살이 고통과 슬픔뿐 덧없이 지나가고 쏜살같이 빠르게 날아갑니다”(시편 90:10).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유혹을 받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생기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야고보서 1:14, 15). 여기 언급된 "욕심(lust)"은 석가모니가 말한 “갈애, 탐욕”과 똑같은 단어이다.

■ 일이 끝나면 마음도 빈다
한번은 선사(禪師)가 젊은 수행승과 여행을 하다가 개울가에 이르렀다. 그런데 간밤에 내린 비로 물이 불어 한 젊은 처녀가 개울을 건너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는게 아닌가. 이를 본 선사는 망설임 없이 처녀를 덥석 안아 개울을 건네주었다. 처녀와 갈림길에서 헤어진 뒤 한참을 가다가 수행승이 아무래도 석연치 않다는 듯이 선사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아까는 선사께서 지나치셨던 것 같습니다."
"무얼 말인가?"
"출가한 사문(沙門)이 젊은 처자를 덥석 안은 것 말입니다."
그러자 선사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저런, 나는 그 처녀를 아까 그 개울가에 내려두고 왔는데, 자네는 아직도 안고 있구먼."

수행승처럼 어떤 사건과 헤어져 먼 길을 왔으면서도, 여전히 마음은 과거에 머물러 있을 때가 있다. 모욕과 상처, 유기(遺棄)와 배신에 대한 기억으로 반복해서 고통을 당하기도 한다. 잃어버린 돈, 빼앗긴 돈, 사기당한 돈, 사고로 사별한 가족, 과거의 실수나 실패 등에 고착되어 벗어나지 못할 때도 있다. 모두가 집착의 일종들이다.
채근담에 이런 말이 있다. "성긴 대숲에 바람이 불어와도 사라지고 나면 소리가 남지 않으며, 큰 연못을 기러기가 건너 날아도 건너고 나면 그 그림자가 남지 않는다. 그러므로 군자는 일이 생겨야 비로소 마음이 나타나고, 일이 끝나면 마음도 따라서 빈다."
일이 끝나면 마음을 비우는 것이 지혜이다. 현대인들의 비극은 채워넣기만 하고 비우지 못하는 데 있다. 본래 내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하고, 못 봤다고 생각하고, 꿈이었다고 생각하면 그만인 것을, 종종 미련(未練) 때문에 미련을 부려 고통을 자초한다.
노자(老子)는 말했다.
“삶에 집착이 없는 사람이 삶을 소중히 여기는 자 보다 현명한 자이다.”

■ 극히 값진 진주를 사라
예수께서는 천국을 이렇게 비유했다.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마태복음 13:45-46)
여기서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는 구도자(求道者)들을, “극히 값진 진주”는 예수를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진정한 해탈은 일체의 욕망을 버림으로가 아니라, 유일의 가치가 있는 단 하나를 얻음으로 이루어진다고 가르친다. 사람이 진정 일체의 욕망을 버릴 수 있는가? 욕망을 버리려는 그 자체가 또한 욕망이 아니던가?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만남으로 일체의 욕망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사도 바울이 그랬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빌 3:7-9).
마취제인 클로로포롬을 발견한 과학자 제임스 심슨경이 죽게 되었을 때, 과학자들과 친구 그리고 친척들이 모여 그의 업적이 칭송하기 위해 물었다. “당신이 지금까지 발견한 것 가운데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심슨 경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나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나는 죄 많은 죄인이라는 사실과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들의 구주요 나의 구주시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 역시 가장 값진 진주 하나를 얻음으로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은 사람이었다.

박성하 / 로뎀아카데미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