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평의 영성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때로부터(창 4:8) 이 땅에는 폭력과 살인과 분쟁과 전쟁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한 다큐멘터리에 의하면 지난 5천 년 동안 1만 4천5백 번 전쟁이 있었고, 전쟁으로 약 35억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유사 이래 지구촌에서 전쟁이 없는 날은 불과 며칠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죽은 자만이 전쟁의 끝을 본다.’고 하였습니다.
참혹한 전쟁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가족이나 친척 관계, 이웃 관계, 교인 관계에서 많은 갈등과 불화를 경험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받는 스트레스의 약 80퍼센트는 인간 관계에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오늘 예수께서 말씀하신 “화평하게 하는 자”는 헬라어로 ‘에이레노포이오이’인데, ‘화평’을 의미하는 ‘에이레네’와 ‘만들다’를 의미하는 ‘포이에오’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므로 ‘화평을 만드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단순히 화평하게 사는 사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화평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어린아이라도 성냥 하나로 건초더미에 불을 붙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건초더미에 붙은 불을 끄는 데는 어른 몇 사람도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말 한마디로 분쟁을 일으키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분쟁을 수습하는 데는 몇 백배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어떤 때는 전혀 수습이 안 될 때도 있습니다.
‘화평을 만드는 자’가 될 때,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 기자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특히 사도 바울은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8)고 권고합니다. “너희로서는”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그것이 너희에게 달려 있는 한’이라는 의미입니다.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면서 완전한 화평을 유지하는 것이 항상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까닭 없이 무고(誣告)를 당할 수도 있고, 시기와 질투에 의해 비난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또 진리대로 살려고 하는 것이 다른 사람의 적대감을 유발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할 수 있거든’이라는 조건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평화가 깨질 때마다 자신의 잘못은 없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박성하 / 로뎀아카데미 원장